재미있는 길은 빠른 길이 아니라 안 가본 길
주말 오전 9시, 평소라면 이불 안에서 뒹굴뒹굴할 시간에 이미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산을 준비했다. 원점 회귀를 즐기지 않는 편이라 올라왔던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땀범벅이 된 사람들이 무리 지어 올라오는 게 보였다. 해장술부터 하고 오신 건지 멀리서부터 쿰쿰한 술 냄새가 먼저 인사를 건넸던 중년의 산악회,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다람쥐처럼 잽싸게 오르는 아이와 함께 한 가족 등산객, 형형색색 레깅스와 새 등산화가 반짝이던 MZ세대들 등등 세대도 취향도 다른 그들은 알뜰하게 주말 오전부터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칠 때마다 마스크 안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이 길 진짜 노잼인데...
힘들기만 해요.
그래도 힘내요. 포기하지 마요.
내가 내려간 길은 대한민국의 많은 산에 하나쯤은 있다는 그 이름 [깔딱 고개]였다. 경사가 가파르고 험해 숨이 깔딱깔딱 넘어간다 해서 붙여진 이름. 보통 이 길은 최단 거리와 최단 시간 안에 정상에 오르는 코스를 끼고 있는 등산로라는 공통점이 있다. 사실, 효율의 민족에게 이보다 좋은 루트는 없다. 좀 힘들더라도 최소의 시간을 투자해 정상에 오르는 기쁨을 맛볼 수 있으니까.
산에 올라갈 때에 비해 절반의 에너지만 써도 되는 하산길. 깔딱 고개를 내려가면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울퉁불퉁하고 불규칙한 돌들. 게다가 경사는 거의 90도에 가깝다. 중간중간 나무로 된 계단이 있지만 그 계단의 높이도 만만치 않다. 잠깐 한눈을 팔았다가는 삐끗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오를 때 보다 더 신경은 날카로웠고, 다리에 힘이 풀려 후들거렸다. 이 길로 올라왔다면 난 중간에 포기했을 게 분명하다.
생각해 보니, 등산이란 걸 처음 해 본 건 사회 초년병 시절이었다. 지인들이 산에 갔다가 내려와서 막걸리에 파전 먹자고 꼬시는 통에 별 준비도 없이 운동화에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처음 갔던 곳이 수락산 <깔딱 고개>였다. 돌바닥과의 사투 끝에 영혼이 털린 채 산에서 내려와 약속대로 막걸리에 파전을 먹었다. 가출한 영혼을 소환하는 얼음 막걸리를 목으로 넘기며 ’ 나란 인간은 등산과 안 맞는 사람‘이라는 편견의 도장을 콱 찍어 버렸다. 깔딱 고개가 안겨준 쓰린 교훈 때문에 그 후 10년 넘게 등산은 감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 차피 내려갈 산을 왜 올라가는가? 산은 오르는 게 아니라 멀리서 보는 거다.’라는 비겁한 논리들을 내 안에서 차곡차곡 채웠다.
하지만 올해 우연한 계기로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하고서야 알았다. 나는 등산과 안 맞는 게 아니라 깔딱 고개와 안 맞는 사람일 뿐이었다. 내가 재미있다, 좋다고 느끼는 등산로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① 한적할 것 ② 풍광이 시원할 것 ③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루브가 있을 것 ④ 암릉과 평탄한 흙길이 적당히 섞여 있을 것 ⑤ 종종 4족 보행도 필요할 정도로 난도가 있을 것 등등 길의 높낮이와 바닥의 재질이 다채로워야 산을 오르는 재미가 있다. 깔딱 고개처럼 틀로 찍어낸 듯 똑같은 풍경에 무작정 경사가 가파른 돌길만 계속되는 건 무릎에 무리만 가지 재미가 없다. 아! 깔딱 고개를 오르는 재미가 하나 있긴 하다. 시계를 보는 순간. 적어도 내게는 최단 시간 안에 정상에 올랐다는 기쁨은 깔딱 고개를 선택하는 유일한 이유다.
(물론 트레일 러닝을 하는 분도 계시지만) 등산은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다. 몇 시간 안에 정상을 찍고 돌아와야 하는 미션 수행이 아니다. 불타는 허벅지를 풀어가며 혼자서 나의 한계를 시험해 보기도 하고, 몸 밖으로 튀어나올 거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며 호흡을 가다듬기도 한다. 또 두 발로는 힘이 모자라 두 손까지 합세해 4족 보행하며 동물들의 눈높이를 체험해 보기도 하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응원받기도 하고, 길을 헤매는 낯선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어 보기도 한다. 한 발 한발 오르다 무심코 뒤를 돌아봤을 때 손톱만 하게 보이는 땅의 모든 것들을 느끼며 내 안의 잔뜩 짊어지고 온 고민도 별거 아닐 거라는 위안을 받곤 한다. 이게 바로 깔딱 고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등산의 즐거움이다.
남들은 KTX라도 탄 듯 최단 시간 내에 목표 지점에 닿는데 나는 왜 이리 더디게 가고 있을까? 왜 이토록 헤매고 있을까? 내 인생이 답답하다고 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나는 깔딱 고개 체질이 아니라는 걸. 깔딱 고개가 아니라 적당한 굴곡과 경사, 흙길과 암릉이 뒤섞인 다채로운 길에 더 의미와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다. 그러니 속도 경쟁은 애초에 의미 없는 싸움이었다. 나는 KTX보다는 무궁화호 재질이다.
정상에서 날 기다리는 건 휘황찬란한 별천지가 아니다. 해발고도가 적힌 크고 작은 정상석, 인증샷을 찍기 위해 정상석 앞에 줄 선 사람들, 무리 지어 산스토랑(산+레스토랑) 뷔페를 차린 사람들, 등산객들에게 애교를 부려 먹을 것을 구하는 산고양이 외에 별거 없다.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잠시 거칠어졌던 호흡을 고르고, 땀이 식기 전에 다시 하산 준비를 한다. 왔던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몸을 튼다. 가장 재미있는 길은 빠른 길이 아니라 안 가본 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