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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un 27. 2022

본의 아니게 남의 아지트에 무단침입

환영받지 못한 불청객의 추억


      

이제 막 여름이 시작되던 어느 해, 제주 서우봉 산책길을 걸었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느긋하게 아침 산책을 하고 나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땀을 식히고 싶어 함덕해수욕장 근처 카페를 찾아 이리저리 걸었다. 아직 본격 성수기가 시작되지 않은 탓인지 아님 시간이 일러서인지 문을 연 카페가 없었다. 포기하고 이동하려던 찰나 골목 끝에서 작은 카페가 눈에 띄었다. 주인은 해양 스포츠가 취미인지 여기저기 관련 장비들이 놓여 있었고 세계 각국에서 가져온 듯한 아기자기한 소품이 카페 밖을 장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그마한 창 바로 앞에 테이블이 있어서 안에 앉으면 제주 바다가 액자에 담긴 풍경처럼 보일 거 같았다. 이제 됐다 싶어 빼꼼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함께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기운이 얼굴에 확 달라붙었다.      


이 기운의 주인공들은 바로 주인과 수다를 떨고 있던 지인들이었다. 반려견 산책을 시키러 나왔다가 동네 사랑방인 이곳에 잠시 눌러앉아 왁자지껄 수다를 떨던 그들은 낯선 손님의 등장에 놀란 눈치였다. 마치 ‘이 시간에 왜 손님이 왔지?’라고 온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그거야 그들의 사정이고 난 지친 다리와 마음을 쉬게 해줘야 했다. 메뉴판도 보지 않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킨 후 천천히 카페를 둘러봤다.  

  

주인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세계 곳곳 해양 스포츠를 즐기며 찍은 사진만 봐도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갑갑한 회사 생활이 싫어 잠수하다 물 위로 숨을 쉬러 나오듯 종종 해외에 가서 해양 스포츠를 즐겼던 주인. 한계에 차올라 더 늦기 전에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 회사에 사표를 던진 후 도시를 등지고 제주로 내려왔다. 육지 시절보다 수입은 적을지 몰라도 마음 맞는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제주 라이프를 즐기고 있던 걸까? 요망한 상상을 하는 사이 저벅저벅 내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커피를 내려놓으며 주인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지나가다가 창이 예뻐서 들어왔어요.”     


“아하... 네... 맛있게 드세요 “     


언제 다듬었는지 가늠이 안 될 머리칼과 수염이 덥수룩한 주인이 까맣게 탄 손으로 내온 커피는 향이 진했고, 제주 바다처럼 맛이 깊었다. 낯선 이의 방문에 잠시 소강상태였던 주인과 지인들의 수다는 점점 볼륨이 커졌다. 때아닌 손님의 등장에 끊겼던 수다의 맥이 거침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나도 같이 수다 좀 떨자고 할 ‘인싸력’을 가지지도 못했고, ‘거 참 적당히 좀 합시다.’라고 단호하게 말할 깡도 없는 외지인은 조용히 이어폰을 귀에 꽂는 걸로 소음을 차단했다.    

  

욕심이었나?

나는 그저 바다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커피나 한잔하고 싶었을 뿐인데...      


채 30분을 넘기지 못하고 쫓기듯 카페를 나왔다. 결코 느긋하게 있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남의 아지트에 무단 침입한 불청객이 된 기분이랄까? 누구 한 사람 뭐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마치 내가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만 없었다면 좀 더 편안히 수다를 떨 분위기였다. 이어폰 너머로 슬쩍슬쩍 들리는 단어만 봐도 나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인생 샷 찍겠다고 동네 사유지 여기저기를 침범하는 관광객부터 걸음마다 쓰레기를 버리는 쓰레기 무단 투기범이며 밤이면 낭만에 취해 고성방가를 일삼는 육지에서 건너온 고음 메이커까지... 현지 주민들의 골칫덩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크게는 ‘육지 것들‘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한통속으로 욕먹을 사람 중에 현지인이 아닌 난 분명 포함되어 있었다. 일부러 들으라고 크게 얘기 한 건 아닐테지만 얼굴이 뜨거워져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날의 경험 이후 개인 카페에 갈 때면 문을 열었을 때 지인들로 수다 삼매경인 상황이면 조용히 뒷걸음쳐 나온다. 나의 등장으로 그들만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아서. 더 정확히는 내 돈 내면서까지 불편을 겪고 싶지 않아서. 어쩌다 간 곳이니 당연히 단골 접대 수준의 친밀함을 기대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 카페’이고 간판을 걸고 문을 열어 놨으면 손님이 들어오는 순간 ‘아지트 모드’에서 ‘업장 모드’로 변경해야 한다. 난 공짜 커피를 마시러 들어온 친근한 동네 주민이 아니니까. 지인들과 아지트 삼아 만든 곳이라면 아예 바깥에 ’ 외부인 출입 제한’ 푯말이라도 붙여 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글자를 읽을 수 있는 눈이 있는 한 누군가의 아지트에 무단 침입한 불청객 취급은 받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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