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청춘 한 페이지가 담긴 땅에서의 라스트 댄스를 꿈꾸며
역병이 창궐하기 전, 빡빡했던 삶에 숨통이 작게나마 트이기 시작한 후부터 1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부모님과 여행을 갔다. 번듯한 직장을 가진 것도 아니고, 남들 다 하는 결혼과 손주를 안겨드리는 기쁨을 드릴 수 없는 딸이었다. 어른들이 모이면 흔히 하는 ‘자식 자랑 배틀’에서 부모님이 조개처럼 입을 꾹 닫고 프로 청취자로만 자리를 지키게 할 순 없으니 조그만 돈과 시간을 쪼개 흔히 말하는 효도(?) 여행을 떠났다. 일이나 놀러 공항 문턱이 닳도록 다니던 철없는 딸은 부모님과 여행을 떠나는 걸로 마음의 짐을 잠시나마 내려놓았다. 하지만 장거리 비행은 부모님께는 체력에도, 가난한 내 통장에도 부담이었다. 그래서 보통은 2시간, 길어야 4시간을 넘지 않는 가까운 거리의 비교적 물가가 싼 아시아 국가들이 주 목적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19로 국경이 닫히기 전, 마지막 여행지는 일본 가고시마였다. 연례행사처럼, 연초에 있는 내 생일을 기점으로 여행이 시작된다. 혹한이 몰아치는 한국을 떠나 따뜻한 가고시마에서 일주일. 거의 1일 1 온천을 하고, 모래찜질을 하고, 따끈한 우동을 먹으며 뜨거운 겨울방학을 알차게 즐겼다. 향신료나 무더위 때문에 쉽게 지쳤던 그간의 동남아시아 여행에 비해 비슷하면서도 이국적인 일본 가고시마에서 부모님은 한층 더 적극적이고 자유롭게 여행을 즐겼다. 갈수록 해외여행의 짬이 차서 새로운 음식, 방식, 사람들에게 격 없이 다가가는 부모님의 모습을 볼 때, 성장의 기쁨과 투자의 보람을 동시에 느꼈다.
가고시마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공항에서 다음 여행지는 어디가 좋을까 생각했다. 연세가 드시고, 체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는 부모님과의 여행은 에너지와의 싸움이다. 한 해 한 해 함께 여행을 다니며 여행지를 구경하는 시간보다 호텔에서 체력을 보충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는 걸 체감했다. 엄마 아빠와 함께 남의 나라 땅을 밟을 기회가 몇 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 거다. 어쩌면 다음 여행이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에 좀 더 신중하고, 의미 있는 여행지가 필요했다.
몇 해 전, 호찌민을 시작으로 무이네, 달랏, 냐짱으로 이어지는 12일간 베트남 여행을 한 적 있다. 베트남은 아빠가 처음으로 밟은 해외 땅이었다. 약 반세기 전, 현지인들은 꾸이넌이라 부르는 베트남 퀴논에 군복을 입은 아빠가 있다. 통신병이었던 아빠는 베트남전 참전용사로 한국에서 출발해, 한 달 넘게 배를 타고 퀴논에 도착했다고 했다. 가난했지만 입이 짧았던 7남매의 장남은 난생처음 경험하는 동남아의 무더위보다 음식이 더 고역이었다고 기억했다. 미군이 한국군에게 보급했던 우윳가루(?)로 겨우 연명했다. 지난번, 베트남 여행 중 무이네에서 리조트 휴양을 끝내고 베트남의 대관령이라 불리는 고산도시, 달랏으로 향하는 길. 지루한 장거리 버스를 타고 가던 아빠는 창 밖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날로 총기가 흐릿해지는 아빠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저 복사해 붙인 듯 끝없이 이어지는 논과 밭, 그리고 산들이 전부였는데 뭐가 그리 신기했을까 의아했다. 무사히 달랏에 도착해 저녁을 먹을 때 여쭤봤다. 뭘 그렇게 넋 놓고 봤는지.
‘지금 퀴논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했어’
아빠의 젊은 날이 알알이 박혀 있는 땅, 퀴논. 피부가 까맣게 탄 늠름한 청년이 머리가 새하얀 노인이 되어 다시 베트남에 왔다. 베트남이 개발도상국인 걸 감안하면 천지가 개벽할 시간이다. 당시에도 퀴논에 가보고 싶은 아빠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선 듯 그곳에 갈 순 없었다. 왜냐하면 난 그 당시 베트남 초심자였기 때문이다. 베트남어는 물론 영어도 능숙하지 않으면서도 난 자유여행을 택했다. 난생처음 가보는 곳을 가이드 없이 노령의 부모님을 모시고 다녀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있었다.
아빠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퀴논. 여행 정보 검색도 힘든 그곳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니 여행 쫄보는 호찌민이나 냐짱 같은 여행 인프라가 갖춰진 곳을 택해야 했다. 이번 여행은 베트남 워밍업이고, 짬을 쌓아 다음에 제대로 퀴논에 와야겠다 다짐했다. 지난번에는 남쪽에서 중부지방까지 올라갔으니 이번에는 북쪽 사파에서 시작해 하노이, 후에, 호이안까지 내려와 마지막에 퀴논에서 ‘라스트 댄스’를 춰야겠다 생각했다. 계획은 눈부실 만큼 완벽했다. 하지만 그 망할 놈의 역병이 발목을 잡을 줄 나도, 아빠도 몰랐다.
풀지 못한 숙제처럼 마음에 남아 있는 퀴논을 종종 검색해 본다. 코로나19가 터지기 직전 2019년 연말 기사에서 2020년 떠오르는 여행지로 꼽은 퀴논. 베트남의 몰디브라 불리는 곳으로 베트남에서 일출이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 국적기가 직항으로 일주일에 6번 취항하기로 했고, 세계적 호텔 체인 리조트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호찌민이나 하노이에 질린 관광객들에게 퀴논은 신선한 대안이었다. 코로나 19만 아니었다면 이미 퀴논에 다녀와 귀가 닳도록 퀴논 얘기를 했을 우리 가족이다. 반세기 전의 모습에 머물러 있던 아빠 머릿속의 퀴논이 업데이트됐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건 다 코로나 시국 이전의 일. 3년 여의 시간이 지나며 규제가 완화되고, 국경이 열리곤 있지만 선 듯 떠나기 쉽지 않다. 내 마음의 빗장이 열리고, 내 통장의 여유가 피어나고, 아빠 엄마가 해외여행을 할 체력이 한 줌이라도 남아 있는 그 절묘한 기적 같은 때가 오긴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