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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ul 11. 2022

콩국수 대신 커피와 와플

그게 다 고종 때문이었다


   

지독한 계획형 인간은 어딘가에 가면 근처에 먹을만한 곳이 어딘가부터 탐색한다. 장소와 음식의 페어링이랄까? 보통은 카페고, 식사 때라면 음식점이 된다. 산에 가면 등산의 피로를 씻어줄 도토리묵과 막걸리 파는 곳, 바다를 바라보며 해물라면을 먹을 수 있는 곳, 찜질방을 나오면 같은 건물 1층에 있는 핫도그 집. 뭐 이런 식이다. 장소를 정하면 자연스럽게 먹거리가 떠오른다.      


그날의 목적지는 덕수궁이었다. 전문해설사와 함께 덕수궁 석조전을 관람하는 프로그램을 예약했다. 끝나는 시간은 이른 점심 무렵. 근처 직장인 부대의 공습 전, 여유 있게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좋은 타이밍이었다. 빠르게 머릿속 ‘맛집’ 데이터들을 끄집어냈다. 궁 근처답게 오랜 시간 그곳에서 자리를 지켜 온 유서 깊은 곳들의 이름이 차례로 떠올랐다. 메밀면 집이 있고, 족발집이 있고, 중국집이 있다. 중식은 당기지 않았고, 족발은 무거웠고, 메밀은 가벼웠다.      


이렇게 까다로운 예선 끝에 최종 결승에 진출한 메뉴는 콩국수. 어릴 때, 까만 서리태가 콕콕 박힌 밥이 올라오면 인상부터 찌푸리던 나였다. 밥을 먹으며 엄마 몰래 입안에 콩을 하나하나 적립해 놨다가 화장실 가는 척하고 버리고 오거나, 휴지에 뱉어 버리던 약삭빠른 어린이였다. 이렇게 콩과 영원히 친해지지 않을 거 같던 나도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콩국수를 즐겨 먹게 됐다. 장맛비가 부지런히도 내리는 이 계절에 먹기 딱 좋은 메뉴였다.      


제사에는 관심 없고 제삿밥에 눈독 들이는 철부지처럼 오랜만에 콩국수를 먹는다는 설렘을 가득 안고 덕수궁으로 향했다. 그리스 신전처럼 육중한 기둥이 늘어선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금세 대한제국 시절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70분간 그간 알지 못했던 그리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숨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고종. 열강들에 휘둘려 나라를 빼앗긴 무능하고 슬픈 황제로 머릿속에 남아 있던 고종의 이야기는 긴 여운을 남겼다.     


커피 애호가였던 조선의 마지막 왕,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 그는 커피를 좋아했기 때문에 죽을뻔하기도 했고, 역으로 커피 맛을 잘 알았기 때문에 무사하기도 했다. 자신의 생일날 관리가 올린 커피의 맛이 예전 같지 않자 소량만 마셨지만 커피맛을 잘 몰랐던 황태자, 순종은 꽤 많은 양을 마신 후 치아 18개를 잃었다. 아는 얘기도 있었고 모르는 얘기도 있었지만, 해설과 함께 석조전을 둘러보기 전과 후 가장 달라진 점은 고종을 향한 시선이었다.     


고종 황제 무능설은 일본이 1905년 ‘보호조약’ 강제 후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한다. 한국은 군주가 무능해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됐다고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고종에 대한 평가는 2000년 이후 급 반전됐다고 한다. 연구가들은 그간의 상식을 뒤집고 그가 현명하고 의지가 굳은 개혁 군주였다고 발표했지만 이 연구 결과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2000년대 이전에 역사 교육을 받았던 내 머릿속의 고종은 힘없는 나라의 무능한 군주 모습에 갇혀 있었다. 혼란스러운 시대, 나라와 백성을 위해 갈림길에 서야만 했던 고종. 그가 수없이 마셨을 커피 안에 담긴 고뇌와 고민이 100년 후를 사는 나에게까지 닿았다.      


덕수궁에 들어서기 전까지 오직 콩국수를 향해 직진했던 마음이 어느새 커피에 도착했다. 대한문을 나와 내 발길이 향한 곳은 콩국수 집이 아니라 카페였다. 덕수궁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카페. 고종이 사랑한 디저트로 알려진 와플로 유명한 집에서 새로 오픈한 카페다. 비에 젖은 덕수궁을 멍하니 보며 두툼한 와플을 곁들여 홀짝홀짝 커피를 마셨다. 분명 전에도 수 없이 덕수궁에 와서 와플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하지만 몰랐던,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고종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 후 먹고 마신 커피와 와플 맛은 이전과 달랐다.     

 

계획이 틀어지는 것에 몹시 스트레스를 받는 스타일인데도 그날의 메뉴 변경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커피를 사랑했고, 그보다 더 백성을 사랑했던 고종의 고뇌와 슬픔을 잠시 가늠해 보는 시간. 대한제국 시절에 살았던 고종과 현대에 사는 나. 100여 년의 시간 차, 황제과 일개 평민이라는 신분 차도 있지만 우리 모두 커피를 통해 잠시 시름을 지우고, 에너지를 채운다는 공통점이 있다. 멀게만 느껴졌던 고종에게 한 발짝 다가간 시간. 이제 덕수궁에 가면 콩국수 보다, 족발 보다, 메밀면보다 커피가 아니 정확히는 커피를 마시는 고뇌에 찬 고종의 모습이 떠오를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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