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들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
양상추, 파프리카, 리코타 치즈, 냉면 육수, 분홍 소시지 등등 마트에서 산 식재료들이 가득 든 에코백 끈에 어깨가 짓눌리고 있었다. 앞으로 횡단보도 두 개만 건너면 집이다. 다섯 갈래로 갈라진 도로의 신호등은 좀처럼 쉽게 초록 불로 바뀌지 않는다. 정수리로 꽂히는 뜨거운 직사광선을 비해 신호등 옆 그늘막에 서서 느긋하게 차례를 기다리다가 건너편 사람에게 시선이 멈췄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운동복 차림의 남자. 게임을 하는지, 동영상을 보는지 모르겠지만 스마트폰 화면 속에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하고 있었다. 이미 그의 목은 거북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상태였다. 슬쩍 비슷하게 그의 자세를 따라 해 봤다. 순간이었는데도 금세 목의 통증이 어깨까지 번졌다. 남자는 목이 꽤나 뻐근할 텐데 오래도록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자세로 굳어져서 아픈지도 모르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신호등은 바뀌었다.
사람들은 발을 떼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나 역시 그사이에 껴서 어느새 건너편 남자를 지나쳐 갔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남자를 흘깃 돌아봤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사라지고 깜빡이던 초록 불이 빨간불이 바뀌어도 남자는 그대로였다. 건너편 사람들이 자신을 지나치고 나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아! 놓쳤네’라고 말이라도 하듯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다시 고개를 스마트폰에 박고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 그 자리에서 그 자세로 그대로.
요즘 조용히 나만의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스마트폰과 아름다운 거리두기. 나도 캠페인 전이었다면 저 남자처럼 스마트폰에 눈과 정신을 저당 잡힌 무아지경인 상태로 신호등이 바뀐지도 모르고 길에서 시간을 버리고 있을지 모른다. 물론 스마트폰을 보지 않는다고 딱히 생산적인 일을 하는 건 아니다. 최소한 신호가 바뀌었을 때 타이밍 맞춰 건널 수도 있고,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횡단보도 정지선 앞에 멈추지 않는 몰상식한 운전자의 희생양이 될 확률은 현저히 줄어든다.
거리에서 매일 같이 마주하는 스몸비(smombie,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길을 걷는 사람들로 스마트폰(smart phone)과 좀비(zombie)의 합성어)를 볼 때마다, 나도 저들과 다르지 않을 게 분명하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구부정한 어깨, 영혼 없는 눈빛, 자동차나 오토바이 등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 채 스마트폰 세계에서 빠져 있는 스몸비들. 중세 시대 마녀에게 영혼을 팔고만 어리석은 인간들의 후손은 21세기가 되니 스마트폰에 영혼을 팔게 된 걸까?
스마트폰과 아름다운 거리두기 캠페인 초기에는 갈 길 잃은 눈을 어디에 둬야 하나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내 인생은 스마트폰이 있었던 시절보다 없었던 시절이 더 많다. 예전의 습관들을 소환했다.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 있는 대신 할 건 의외로 많다. 비어 있던 동네 상점의 인테리어 공사 상황을 체크하며 어떤 가게가 언제쯤 오픈을 할지 상상한다. 산책 나온 남의 강아지와 주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눈인사를 한다. 근처 아파트 방음벽을 뒤덮을 만큼 가득 피었던 주홍빛 능소화가 하나둘 떨어지는 걸 깨닫고 여름 냄새 가득한 사진을 한 장 더 찍어 둔다. 얼마 전 동네 로또 판매점에서 2등 당첨자가 나왔다는 안내문(?)을 보고 토요일이 되기 전에 잊지 말고 로또를 사야겠다 다짐한다.
<스마트폰과 아름다운 거리두기> 캠페인의 효과 중 가장 좋은 점은 신호등의 색깔이 바뀌는 때처럼, 내가 멈춰야 할 때와 가야 할 때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스마트폰 세상 안에 모든 답이 들어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궁금한 건 뭐든 검색창에 쳐 넣으면 금세 답을 토해냈다. 자극적이지만 간단하고 직관적인 답들이 쏟아졌다. 사이버 세상에 사는 내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을 사람들이 하는 말은 참고만 해야 했는데 종종 맹신하곤 했다. 점점 스스로 생각하는 근육이 퇴화하는 느낌이었다. 마라탕이나 불닭볶음면 맛의 답만 정답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내민 처방전은 맵찔이가 소화하기 불가능했다.
내가 스마트폰에 고개를 처박고 사이에도 계절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성실하게 바뀌었다. 꽃이 피고 지고, 낙엽이 떨어지고 그 위로 눈이 쌓여 갔다. 쌓인 눈이 녹고 그 사이로 새싹이 피어나는데도 블루 라이트와 전자파에 찌든 흐리멍덩한 눈은 그 변화들이 눈에 담지 못했다. 때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꽃과 나무, 꾸준함의 가치를 알려주는 계절의 움직임이 건네는 위로와 응원을 무심히 지나쳤다. 어쩌면 내가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에 눈을 박고 있는 사이 내게 당도한 수많은 기회를 놓쳤을지 모른다. 그 남자처럼 건너야 할 초록불 타임을 놓쳐 빨간 불에 발이 묶인 채 덩그러니 그 자리에 서서 다음 기회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딱히 켜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스마트 폰에 슬금슬금 손이 갈 때 남자의 굽은 등과 말린 어깨, 몸통보다 마중 나온 거북목을 떠올린다. 200살 먹은 거북이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스마트폰 세상으로 다이빙하는 나를 상상해 본다. 스마트폰을 향하던 손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날개뼈를 조이고 척추를 곧게 편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본다. 손에 닿지 않는 스마트폰 세상 말고,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지금 내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천천히 스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