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믹스 말고 아이스 바닐라 라테
비가 오던 점심, 온종일 집에 있느라 답답해하던 부모님을 모시고 집 근처 작은 손칼국수집으로 향했다. 식당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무섭게 쏟아지던 비는 푸짐했던 칼국수가 바닥을 보일 때쯤엔 어느새 잠잠해졌다. 내가 계산을 하는 사이 습관처럼 카운터 앞 커피 자판기의 버튼을 누르려는 아빠를 급하게 말렸다.
요 앞에 카페 새로 생겼던데 거기 가서 커피 마시자.
어디? 코너 돌면 있는 노란 간판?
거기도 새로 카페 생겼어? 거기 있는 건 또 언제 보셨대?
개업과 폐업이 회전목마처럼 빙빙 도는 동네의 작은 가게 사정은 나보다 아빠가 빠삭하다. 내가 가고자 했던 카페는 칼국숫집에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되는 A라는 곳이었고, 아빠가 생각한 B카페는 칼국숫집에서 2분 거리의 전철 철로가 이어진 골목 쪽이었다. 유동 인구도 많지 않은 주택가에도 구석구석 카페가 포화상태다. 새 카페 탐색이 취미인 내게는 더없는 즐거움이지만 정글 같은 자영업의 세계에 뛰어든 카페 사장님들에게는 혹독한 현실이었다. 각자 차별화된 시그니처 메뉴를 무기로 피 튀기는 생존 전쟁 중이었다.
내가 A 카페를 가고 싶었던 이유는 직접 굽는 소금 빵 때문이었다. 고소한 버터를 잔뜩 품고 노릇 바싹하게 구워진 빵 위에 보석처럼 박힌 하얀 소금이 포인트인 소금 빵 사진을 보는 순간, 마음속 <언젠가 가고 싶은 카페 리스트>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 번화가 대형 빵집이나 유명한 카페에 가지 않아도 집 근처에서 소금 빵을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야심만만하게 엄마 아빠를 모시고 카페에 들어선 순간, 자그마한 카페는 고소한 빵 냄새로 가득했다. 나도, 부모님도 마시는 커피는 정해져 있으니 일단 부모님을 적당한 자리에 안내하고 카운터로 향했다. 메뉴판에 눈길도 주지 않고 쇼케이스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는 소금 빵을 가리키며 주문을 시작했다.
일단, 소금 빵 두 개랑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샷 하나 뺀 연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차가운 캐러멜 마키아토 한 잔이요.
소금 빵을 제외하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나, 연하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는 엄마,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또는 아빠 몫이었다. 주문을 듣던 직원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저... 손님. 저희는 캐러멜 마키아토가 없어요.
어? 그럼 아포가토요.
아... 그것도... 없...
그럼 비슷한 달달한 커피는 뭐가 있을까요?
저희는 바닐라 라테가 맛있어요.
파우더가 아니라 진짜 바닐라 빈이 들어가거든요.
주변에 유독 마니아가 많은 음료, 바닐라 라테. 직원은 아빠 몫으로 그 커피를 추천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 바. 라.(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시키던 지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체 뭔 맛인가 싶어서 한 번 시도해 보긴 했지만 맛도 향도 다디달던 아바라는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내 인생의 바닐라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으로 충분했다. 일단 아빠의 최애 음료, 캐러멜 마키아토도 아포가토도 없다는 상황을 설명하고 동의를 가장한 통보를 한 후 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주문했다. 잠시 후 고소하고 따끈한 냄새를 폴폴 풍기는 소금 빵과 명도가 다른 석 잔의 커피가 우리 앞에 놓였다. 커피를 마신 양과 횟수를 따지면 우리 가족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지독한 맥 X 커피 믹스 중독자, 아빠의 반응이 궁금했다. 내 커피는 일단 제쳐두고 난생처음 아바라를 영접하는 아빠의 표정에 집중했다. 조심조심 빨대로 아바라를 쭉 들이키자마자 아빠의 동공이 터질 듯 커졌다.
어? 이거 뭐냐?
아바라. 아이스 바닐라 라테. 어때?
음... 괜찮네.
(아빠의 ’ 괜찮네 ‘는 ’ 맛있네 ‘와 같은 의미다. 만족도 90 이상일 때 쓰는 최상급의 표현)
아포가토 보다?
응
캐러멜 마키아토 보다?
그려
이제 아포가토 말고, 캐러멜 마키아토 말고 이거 드시겠네.
그래서 이거 이름 뭐라고?
아... 아... 바...
아이스 바닐라 라테. 아바라. 나중에 카페 가면 이렇게 말하면 직원이 깜짝 놀랄걸?
머리 하얀 할아버지가 아바라 시킨다고 멋있다고 할 거야.
아바라로 아빠의 커피 세계가 또 한 뼘 넓어졌다. 아침저녁으로 물처럼 마시는 노란색 맥* 커피 믹스에서 아포가토로. 다시 아포가토에서 캐러멜 마키아토로. 여기까지는 이전에도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아마 아빠 인생에 가장 맛있는 커피는 캐러멜 마키아토로 마감할 줄 알았다. 하지만 딸의 섣부른 생각은 아바라로 와장창 깨졌다. 일찌감치 바닥을 보이고 얼음만 덩그러니 남은 잔의 빨대를 연신 홀짝이며 바닥의 아바라까지 흡입하던 아빠에게 물었다.
그 커피 이름이 뭐라고?
아... 아 바...
아바라. 아이스 바닐라 라테.
캐러멜 마키아토도 겨우 외웠어.
할머니 산소 벌초하러 시골 가서 끝내고 카페 갔더니 고모들이
’ 오빠는 그 나이에 캐러멜 마키아토도 아냐 ‘고 놀라더라.
이제 ’ 이거’ 주문하면 고모들 놀라 자빠지겠다.
우쭐우쭐하며 동년배와 격이 다른 커피 취향을 자랑하던 아빠를 보며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한 보람이 느낀다. 카페를 나와 10분도 안 될 거리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 한 번 더 물었다. 아바.. 아바... 만 연신 내뱉는 아빠. 끝까지 아바라를 완벽하게 말하지 못했다. 머지않아 여든이 될 할아버지의 머리에 아바라, 세 음절이 박힐 때까지 수없는 투자와 훈련이 필요하다. 햇볕은 따뜻하고, 바람은 선선한 가을. 아바라의 묘미를 제대로 느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여든 살이 가까운 아빠만을 위한 ‘아바라 특훈’의 시즌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