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 못 할 다짐을 또 하는 이유
# 돌아가자마자 사진 정리부터 해야지
# 캐리어 안에서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물건은 다음 여행에는 챙기지 말아야지
# 여행 일정은 좀 더 여유 있게 짜야지
# 번역 앱에 작작 의존하고 짬짬이 외국어 공부해야지
# 기력 딸리면 만사 귀찮아하니까 꾸준히 체력 키워야지
# 또 떠나려면 부지런히 돈 모아야지
비행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서둘렀음에도 매번 정신없고, 긴장되는 출국 수속을 마치고 나면 그제야 정신이 든다. 나의 에너지 드링크이자 일상용 진정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면서 이번 여행의 순간들을 천천히 곱씹어 본다. 도착한 첫날의 흥분, 이국적인 풍경, 낯선 말소리, 신기한 음식 등등 굳이 핸드폰 속 사진 폴더를 펼치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여행의 순간들을 곱씹는 생각의 끝에는 각종 다짐이 모이게 마련이다.
왕왕 울리는 통에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안내 방송, 잠시 한눈이라도 팔면 3단 분리되는 유아 동반 가족의 한 편의 행위 예술같은 이동, 이삿짐 수준의 폭풍 쇼핑을 한 부유한 여행객의 카트를 구경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다짐을 굴린다. 부지런한 쇠똥구리처럼 생각을 굴리고 굴려 크고 단단한 결심을 만든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탑승구 앞 의자에 앉아 있을 때면 똑같이 재생되는 풍경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비행기에 타는 순간 코안으로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기내 공기 안에 다짐 삭제용 마취 가스가 퍼져 있는 걸까? 기내식 사이사이에 기억을 잃게 만드는 특수한 약이라도 뿌려 놓은 걸까? 기내용 모니터에서 플레이되는 영상 안에 다짐을 잊게 만드는 최면 기술이라도 담아 놓은 걸까? 이것도 아니라면 비행기 기체가 고도 몇 피트 이상 되면 탑승객의 다짐이 휘발되도록 설계되어 있음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현실로 돌아오면 공항 탑승구 앞 의자에 앉아서 했던 다짐은 지우개로 지운 듯 깨끗한 백지상태가 된다. 대신 빨리 짐을 찾고 나가서 먹을 첫 메뉴를 고르기 위해 머릿속에서는 <한식 이상형 월드컵>이 펼쳐질 뿐이다.
먹고사니즘에 치여 외국어 공부도, 운동도, 여행 자금 모으기도 우선순위에서 멀어진다. 그러다 다시 여행을 떠날 때가 되면 지난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다짐들이 한 많은 망령처럼 되살아나 나를 괴롭힌다. 외국어 실력은 진전은커녕 날로 퇴보해가고, 체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고, 여행 통장은 말해 뭐해. 다시 가진 한도 내에서 시간을 쪼개고, 기대를 구기고, 예산을 나노 단위로 나누고, 빈약한 체력과 외국어 실력을 끌어모아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여행에 끝에는 다시 다짐하고, 어김없이 진전 없는 나의 현실과 마주하며 머리를 쥐어뜯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던가?
한때는 여행이 하루하루를 부지런히 살아온 사람이 받는 종합 선물 세트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여행력이 쌓일수록 여행은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를 좀 더 자세히 알게 되는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일상에서라면 굳이 시도하지 않을 도전(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몸 쓰는 액티비티, 동공을 마주치기 쉬운 비릿한 생선 요리 등)을 시도하고 뿌듯해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하루에 4만 보 정도 걸으면 발바닥에 감각이 없어지는 인간이라는 걸 깨닫는다. 지독한 고소공포증이 있지만 낯선 도시에서는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보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인식하게 된다. 외국어로 긴 문장의 대화는 어려워하지만, 현지인에게 발음은 좋다는 칭찬을 받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된다. 문법적으로 완벽한 문장이 아니어도 뉘앙스와 표정, 자신감이 오히려 대화에 더 필요하다는 진리를 뼛속 깊이 새긴다. 생존을 위한 의무감이 아닌 책임은 내려둔 홀가분한 여행객으로 오롯이 순간에 집중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기쁨이다. 그런 사소한 경험은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높고 견고했던 내 마음의 벽을 낮추는 발판이 된다. 마음의 부담감은 내려두고 한층 적극적으로 내 일상에 다가간다.
여행의 끝, 매번 (대부분) 실행하지 못할 다짐을 하며 피식 웃는다. 공항을 나서는 순간 까맣게 잊을 게 분명한 다짐들은 예상치 못한 순간 불쑥 나타나 나를 쿡 찌른다. 지하철역 개찰구 앞에서 핸드폰 속 지도를 보며 우왕좌왕하는 외국인 관광객을 보며 여행객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낯선 땅에서 내가 받았던 이름 모를 이의 친절을 돌려줘야 할 거 같은 의무감 때문일까? 낯선 땅에서 겪었던 막막함에 대한 동질감 때문일까?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오지랖을 부리며 짧은 미천한 영어 실력을 총동원해 길을 알려준다. 고개는 끄덕인 그 외국인이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을지, 원했던 목적지에 정확히 도착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뿌듯함은 내 몫이다. 머지않아 다시 가게 될 나의 여행에서 받을 ’ 친절 마일리지‘를 쌓은 기분이다. 번듯하게 실행하지 못한다고 해서 여행 끝의 다짐들이 영영 죽는 게 아니다. 여행을 통해 다짐하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일상 속 작은 실천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내가 바란 ’ 괜찮은 인간‘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