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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Dec 27. 2023

여행의 꽃은 변수

비행기 결항, 수화물 파손, 소지품 분실이 한 여행에서 일어난다면?

여행의 꽃은 뭘까? 맛집? 사진? 쇼핑? 나도 이 중 하나인 줄 알았다. 하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떠난 15일간의 베트남 여행을 통해 여행의 진정한 꽃은 ‘변수‘라는 걸 알게 됐다. 이번 여행은 내 여행 역사상 변수가 가장 많았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였던 아빠가 근무했던 베트남 중남부 퀴논(현지 사람들은 꾸이년, 뀌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에 가기 위해 시작된 여행. 낼모레 여든을 바라보는 아빠의 마지막 해외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어 일정부터 여유 있게 짰다. 이름난 관광지도 아닌 퀴논에만 가기에는 아쉬워 일정의 반을 하노이, 나머지를 퀴논으로 잡았다. 연세 많은 부모님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 하루는 관광, 하루는 휴식으로 퐁당퐁당 스케줄을 배분했다. 파워 J 계획형 인간의 철저한 자료조사와 준비에도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변수들은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코로나19 이후 첫 해외여행을 온 우리 가족의 평화가 깨진 건 메일 한 통이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순탄하게 하노이 일정을 이어가던 여행 4일 차, 전날 하노이 근교 닌빈 당일치기 여행을 했으니 느지막이 일정을 시작했다. 충분히 자고 일어나 서호 한 바퀴를 돌고 근처에서 점심을 겸한 이른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부모님이 먼저 샤워를 끝내고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며 습관처럼 이메일을 여는데 당황스러운 단어가 내 눈에 들어왔다.      


CANCELLED     


계획대로라면 3일 후 국내선을 타고 하노이에서 퀴논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정확한 이유 설명 없이 그저 항공편이 취소되었다는 내용뿐이었다.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스케줄 변경이나 취소가 잦은 저가 항공사를 피하려 돈을 더 주고 안정적인 대형 항공사를 택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상상도 못 했다. 일단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대체 항공편이 있는지 문의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그 항공사’의 일방적인 항공편 취소를 당한 사람들의 후기를 살폈다.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일단 새 항공권을 구매해 원래 계획대로 움직이거나, 대체 항공편 스케줄에 대해 답변받으라는 것이었다. 일정이 멀었다면 기다렸겠지만 내겐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일단 기존 티켓은 그대로 두고 다른 항공사의 티켓이 있는지 알아봤다. 우리 가족이 가야 할 퀴논은 호찌민이나 다낭처럼 사람이 많이 오가는 도시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예정된 날짜에 퀴논에 가려면 새벽 6시 비행기를 타야 한다. 역으로 계산하면 국내선이라 해도 숙소에서 공항까지 거리가 있으니 넉넉히 새벽 4시에는 움직여야 했다. 부모님 연세가 있다 보니 새벽에 이동하는 불편함을 피하고 싶어 구매하지 않았던 항공편이었다. 티켓 여분이 있는 걸 확인하고 빅똥을 준 항공사의 답변을 기다렸다.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메일이 왔다. 대체 항공편은 당장 내일 오전에 출발하는 비행기란다. 메일을 확인한 시간이 오후 8시. 약 12시간 후에 하노이를 떠나야 했다. 그때부터 발 빠르게 움직였다. 예약해 둔 퀴논 숙소에 하루 먼저 체크인 가능한지 물었고 빛의 속도로 답변이 온 덕분에 노숙 위기는 면했다. 하노이 숙소를 하루 날리고, 퀴논 숙박비가 하루치 늘었다. 부모님께 상황을 설명하고 예정보다 하루 일찍 하노이를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부랴부랴 짐을 싸던 엄마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어? 이게 왜 이러지?     


부모님 방에 가서 확인하니 두 분의 짐이 든 캐리어 두 군데가 부서져 있었다. 아마 인천에서 하노이로 오는 동안 어떤 이유에서인지 캐리어가 깨졌다. 하노이 공항에서는 예약해 둔 숙소행 택시를 타기 위해 바삐 움직이느라 미처 확인할 틈이 없었다. 숙소에서는 도착하자마자 구석에 밀어 두었으니, 어디가 깨졌는지 알 수 없었다. 퀴논으로 이동하기 위해 짐을 다 싸고 캐리어를 닫은 후에야 엄마는 파손 사실을 알게 된 거다. 연이은 불운에 표정 관리가 안 됐다. 하지만 눈치 보는 엄마의 근심 가득한 얼굴을 보니 평소처럼 짜증을 낼 수 없었다. 애써 짜증을 누르고 말했다.      


엄마, 괜찮아. 캐리어는 망가지면 사면되잖아.

엄마, 아빠, 나 아픈데 없이 여행 잘하고 있으니까 그러면 된 거야.     


파손 부위를 확인하니 일단 박스 테이프로 보수하고 한국에 가서 새 캐리어를 사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했나 선배 여행자들의 후기를 확인했다. 다행히 내가 탄 우리나라 항공사는 탑승 7일 이내에 신고하면 보상이 가능하다는 내용을 확인 후 ‘야호‘를 외쳤다. 5일째 밤에 확인한 게 얼마나 다행인가? 이제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 돈 또는 새 캐리어로 받을 수 있었다. 캐리어가 오래됐으니 돈보다는 새 캐리어가 유리했다. 부리나케 파손된 부위 사진을 찍어 항공사에 보내니 바로 접수가 되었고, 인천 공항에 도착하면 새 캐리어를 받도록 조치해 줬다. 외국 항공사의 어처구니없는 대처로 너덜너덜해진 심신이 빠르게 회복됐다. 큰 변수가 많았던 하노이 일정을 마무리하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퀴논으로 향했다.    

하지만 변수는 퀴논에서도 내 발목을 잡았다. 4일간 퀴논 시내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퀴논 외곽 리조트에 도착했을 때였다. 여행 경비의 1/3 가까운 거금을 투자한 5성급 리조트. 이제 즐길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의 한마디에 일순간 시공간이 얼어 버렸다.      


시... 신발이 없어.


신발? 이미 신고 있는데 무슨 일일까? 신고 있는 샌들 외에 여분으로 챙겨 온 운동화와 크록스를 담아 놓은 신발 뭉치가 없다고 했다. 여행 온다고 새로 사서 몇 번 신지도 않은 신발들이었다. 일순간 30도가 훌쩍 넘던 뜨거운 공기가 시베리아급 냉기로 가득 차는 게 느껴졌다. 다시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하지만 감정의 파도에 그대로 휩쓸려 갈 수 없었다. 난감해하는 엄마를 먼저 달래야 했다. 동시에 금방이라도 화를 낼 거 같은 아빠의 입을 막아야 했다.      


엄마, 괜찮아. 아빠, 이거 별일 아니야. 낯선 땅에 와서 엄마 아빠 안 잃어버렸잖아.

여권도 다 있고. 신발은 뭐 또 사면되는 거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머릿속에서는 신발을 찾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뭘지 찾고 있었다. 일단 엄마한테 어디서부터 신발 가방이 보이지 않았는지 물었다.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바로 직전에 묵었던 퀴논의 레지던스와 하노이에서 묵었던 호텔로 메일을 보냈다. 묵고 있는 호텔 프런트 데스크에 가서 더듬더듬 상황을 설명하고 직전 숙소에 전화를 걸어 신발이 있는지 물어봐달라고 했다. 메일보다는 전화가 빠를 테고, 영어보다는 현지어가 설명하기 쉬울 테니 현지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직원은 곧 퀴논 시내 레지던스 신발장에 신발 뭉치가 남아 있었고, 그걸 리조트 직원용 셔틀에 보내주기로 했으니 도착하면 우리 방으로 보내주겠다고 알렸다. 체크아웃을 위해 레지던스에서 나오며 구석구석 다 훑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하며 열어 보지 않은 신발장에 신발이 남아 있었다. 하루가 지나 신발은 무사히 도착했고 안에는 손 글씨 카드가 있었다. 도움을 받은 건 나였는데 자신들의 레지던스를 택해 줘서, 고맙고 당신 가족이 마지막까지 즐거운 여행을 하고 퀴논에서 행복한 기억을 간직하길 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극 F 인간인 나는 또 이런 작은 포인트에 울컥한다. 감동으로 지진이 난 마음을 진정시키며 감사의 메일을 보냈다. 메일을 쓰는 내내 언제나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친절을 아끼지 않았던 베트남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변수가 많았던 보름간의 여행을 마치고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지난 여행을 되돌아봤다. 변수로 삐거덕 거린 순간은 분명 있었다. 당황했고, 화가 났지만 감정에 휩쓸려 쳐져 있어 봤자 해결되는 일은 없었다. 포기하지 않는 한 분명 방법은 있다. 일단 문제를 파악하고 하나하나 대처하면 해결은 된다. 2024년 새해, 내 앞에는 많은 변수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마음먹은 대로, 계획대로 흘러갈 리 없는 게 인생이니까. 비상 깜빡이도 안 켠 변수가 불쑥 머리를 들이밀어도 당황하지 않고 베트남 여행에서처럼 차근차근 풀어가다 보면 내년 이맘때에는 지금 보다 더 환하게 웃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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