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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Sep 26. 2022

삼겹살집에서 과학수사대(KCSI)가 왜 나와?

K-직장인의 흔한 점심시간 풍경 



다섯 살 무렵에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왔다. 이사 왔을 때도 허름했던 집에서 십몇 년을 더 살다 대학 다닐 때쯤 집을 새로 지었다. 그곳에서 다시 20년 넘게 살았다. 그사이 집도 낡고, 사는 사람도 낡고, 동네도 낡았다. 구시가지의 동네는 서서히 늙어간다. 한동네에서 오래 살면 동네의 사소하고 미세한 변화를 쉽게 알아챈다. 어느 집에 갓 난 손자가 와서 밤새 쉬지 않고 우는지, 불법 투기 쓰레기가 쌓이던 놀이터 앞 가로등 밑에 꽃 화분이 놓였는지, 어느 집 창고에 길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를 낳았는지, 새로 이사 온 부부가 어떤 이유로 싸우는지 골목에 담을 넘어 들어오는 소리로 알 수 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의 작은 변화는 쉽게 알아챌 수 있다.      


평범한 늦은 오후, 집 앞 삼겹살집 앞이 어수선했다. 과학수사대 로고가 큼직하게 찍힌 승합차가 서 있고, 과학수사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삼겹살집 안팎을 오갔다. 주인은 몇 번 바뀌긴 했지만 그 자리에서 오래 삼겹살과 맛이 진한 김치찌개를 팔던 곳. 보통은 식당에서 먹는 가격에 절반이면 4인 가족이 배부르게 먹으니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는다. 하지만 밥상 차릴 기운이 없을 때, 집 안에 고기 냄새 배게 하고 싶지 않을 때, 해외에서 오래 체류하고 돌아왔을 때는 캐리어만 대문 안에 밀어두고 그 집에 가서 삼겹살을 구웠다. 외국에도 삼겹살은 있지만 한국식 삼겹살 구이는 한국에만 있다. 무한 리필이 가능한 잘 익은 배추김치와 콩나물무침을 삼겹살 기름에 구우며 내가 진짜 한국에 다시 돌아왔음에 안도하게 해 준 곳이다. 그렇게 가족의 시간과 은근한 애정이 담긴 곳이다. 하루에도 두세 번은 그 앞을 지나게 되는 평범한 동네 삼겹살집에 무슨 사건이 벌어진 걸까?      


사건 사고가 흔한 세상. 뉴스나 드라마,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과학수사대를 현실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멀리서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탓에 일단, 지나가는 동네 1인 역할 엑스트라 표정을 장착했다. 그리고 거북이처럼 목을 쭉 빼 내밀고 어수선한 삼겹살집 안을 흘깃 들여다봤다. 노란 출입 금지 테이프, 족적을 표시한 숫자판, 여기저기 낭자한 선혈, 지문이나 혈흔을 찾기 위해 브러시나 특수 조명으로 비춰 보는 심각한 표정의 과학수사관은... 없었다. 그저 얼굴 가득 신이 나서 점심부터 삼겹살을 굽는 평범한 K-직장인들이 있을 뿐이다. 보통 직장인과 다른 점은 그저 의상(?)이 좀 독특했을 뿐?     

  

아니 왜 과학수사대 유니폼을 입고
대낮에 삼겹살을 구워요?

집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지역 경찰서가 있다.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이 삼겹살집까지 올 수 있다. 동네가 맛집이 즐비한 식당가도 아니고 그냥 주택가니까 직장인 무리가 점심을 먹으러 오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나름 동네 맛집으로 알음알음 소문난 이곳이니 과학수사대가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온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얼마나 바쁘면 과학수사대 유니폼도 못 갈아입고 현장에서 바로 회식 장소인 삼겹살집으로 온 걸까?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만족한 표정으로 배를 두드리며 나오는 과학수사대 사람들을 보니 안도감이 밀려왔다. 첫째, 선한 인상의 삼겹살집 주인에게는 아무런 사고가 없었고 둘째, 과학수사대는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고 셋째, 나는 동네의 평화가 깨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언젠가 과학수사대의 전설적인 인물을 인터뷰한 적 있다. 일반인들도 들으면 알만한 굵직한 사건을 담당했던 분이다. 인터뷰를 위해 서울을 가로질러 그분이 근무하는 경찰서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했음을 알리고 그분이 사무실에서 내려올 때까지 1층 민원창구 근처 외부인 접견실에서 기다리며 경찰서 안을 오가는 경찰들의 표정을 흘깃흘깃 훔쳐봤다. 영화나 드라마 혹은 토요일 밤마다 ‘그알’에서 보던 눈빛만으로 피의자를 제압하던 경찰은 현실에 없었다. 얼굴 가득 찌든 피로와 텅 빈 동공. 분명 걷고 있지만 영혼은 찾아볼 수 없는 K-직장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빌딩 숲 사이 흡연구역에서 쫓기듯 담배를 피우는 직장인, 대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링거 삼아 입에 꽂은 채 걸어가는 직장인, 월급날을 목 빠져라 기다리는 직장인, 퇴근 시간을 카운트하는 직장인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경찰들도 상사에게 까이고, 잘난 후배들에 치이고 점심 메뉴에 일희일비하는 직장인일 뿐이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흉흉한 세상. 늘 멀게만 느껴졌던 경찰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푸짐한 점심 회식에 기분이 들뜬 사람도 있고, 대낮부터 옷에 냄새 배게 고기 굽는다고 구시렁거릴 사람도 있고, 삼겹살이고 나발이고 빨리 들어가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삼겹살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사람도 있을 거다. 경찰 유니폼을 입었지만, 누군가의 아들, 딸이고 누군가의 엄마, 아빠일 사람들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듯, 사건·사고 뉴스와 범죄영화에서 보던 유니폼 입은 경찰을 현실에서 볼 때, 막연하게 두려웠다. 죄지은 건 없지만 경찰 제복을 입은 사람들 곁에는 늘 사건이 있으니까. 하지만 동네 삼겹살집 안팎의 과학수사대를 보며 막연한 두려움이 살짝 옅어졌다. 그들도 그저 먹고사니즘의 고단함을 삼겹살 기름으로 잠시 씻어내는 흔한 K-직장인, 그냥 보통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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