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얼죽아 인간이 변심한 이유
사시사철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는 사람, 즉 얼죽아 인간에게도 일탈의 욕구가 꿈틀거릴 때가 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필요한 순간은 얼굴이 찢어지고 코가 삐뚤어질 것 같은 혹한의 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열치열의 자세로 한여름? 역시 아니다. 얼죽아 인간이 ’따아‘를 주문하는 때는 바로 딱 이맘때다. 여름의 번잡스러움이 사라지고, 서늘한 가을이 성큼 다가온 순간이다.
지난주, 푸짐한 태국 음식 솜땀과 푸팟퐁커리로 배를 두둑이 채우고 향신료 냄새를 온몸으로 폴폴 풍기며 근처 단골 스콘 집으로 향했다. 스콘 가게 문을 여니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직원보다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자석이라도 달렸는지 발이 각종 스콘들이 가득 담긴 쇼케이스 앞에 멈췄다. 계절에 어울리는 밤, 고구마, 단호박 등 구황작물로 만든 노랑노랑한 신상 스콘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스콘들 사이에서 뭘 골라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나의 답은 늘 그렇듯 기본 중의 기본인 시오사토(소금 맛)와 실패할 리 없는 대파 크림치즈를 택했다. 제아무리 멋진 신상이 강력한 유혹을 해도 늘 시키던 걸 시키는 한결같은 사람, 그게 바로 나다. 그리고 이제 음료를 택할 차례. 동행은 언제나 샷 하나를 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먹는 사람이기에 알아서 하라며 먼저 자리로 향했다. 일단 동행 것부터 주문을 넣고, 나도 으레 먹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려다 정신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취소하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래, 때가 왔어.
’따아‘를 마셔야 할 계절이야!
그렇게 올해 첫 ’따아‘를 개시했다. 얼죽아 인간들은 커피콩을 볶아 우려낸 까만 물일 뿐인 커피 중 유독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편애하며 사는 걸까? 보통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대중적이지 않은 이국땅에서도 굳이 얼음 컵을 따로 주문하면서까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셀프 제조하는 걸까? 아마도 속에 열불 나는 일이 일상인 한국인의 근성이 우러난 습관임이 분명하다. 활활 타오르는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소화기를 분사하듯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부으며 산다. 긴 연휴를 마치고 일개미 모드를 켜기 위해 출근길에도, 뒷목 잡게 만드는 뉴스를 볼 때도, 내 안의 흑염룡을 튀어나오게 만드는 트러블 메이커들을 만날 때도, 예의라고는 약에 쓸래도 찾을 수 없는 인간의 탈을 쓴 존재들을 마주할 때도 나의 답은 단 하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상황뿐 아니라 과학적(?)으로 계절과 기온을 따져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거의 모든 계절에 필요하다. 봄에는 춘곤증이 발병하니까 정신 차리려면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셔야 하고, 여름에는 더우니까 당연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그렇다면 겨울에는 난방을 빵빵해 공기가 텁텁하니까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칼칼한 목과 깔깔한 기분을 씻어줘야 한다.
단순한 기호식품을 넘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영혼의 동반자로 여기며 사는 얼죽아 인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1년의 몇 안 될 선택을 하는 순간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접점들이 정교하게 모여야 한다. 냉방도 난방도 필요 없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온, 최적의 향과 온도를 지닌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내는 바리스타의 기교, 따뜻한 아메리카노의 깔끔하고도 포근함이 간절한 기운, 1년에 몇 번 없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먹는 날이 오늘이어야만 한다는 간절한 기분,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도 순간적 행복이 차오르는 기쁨 등등 사소한 이유가 하나하나 모여 기세를 불린 따뜻한 아메리카노는 지박령 같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밀어내고 왕좌를 차지한다.
이제 곧 겉옷 없이는 다니기 힘든 계절이 시작될 거다. 어딜 가나 나약한 인간을 위한 난방기구들이 열심히 일할 할 테니 평소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게 분명하다. 그 말은 즉 따뜻한 아메리카노의 묘미를 즐길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입으로 후후 불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천천히 식혀가며 홀짝일 수 있는 온도와 습도... 그리고 기분은 찰나일 테니 게으름 부리지 말고 부지런히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누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