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면 채우고 채우면 비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일어나 창문부터 열고 화장실로 향한다. 간밤에 쌓인 것들을 시원하게 비워내고, 손을 씻은 후 수돗물로 입을 헹군다. 한결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화장실에서 나와 정수기 버튼을 눌러 물 한 컵을 따른다. 한여름이 아니라면 보통은 냉수가 아닌 미지근한 정수. 컵을 입에 가져다 대는 동시에 리모컨을 찾아 거실 TV를 켠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며 볼만한 프로그램을 찾으며 천천히 물을 마신다.
비운만큼 채운다. 숫자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문과형 인간이 일상에서 실행하는 수학적(?) 행동 공식이다. 이렇게 일부러 공식이자 루틴을 만들어 실행하지 않으면 난 귀찮아서 물 한 잔 안 마시고 살 건조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아침부터 시작되는 ’ 화장실을 다녀오면 무조건 물 한잔을 마신다 ‘는 행동 강령 아래 <비운만큼 채우기 프로젝트>는 온종일 계속된다. 귀차니즘이 극에 달하면 물 마시는 건 참을 수 있어도 화장실 가는 건 참을 수 없다. 방광 사전에 너그러움이란 단어는 없다. 몸뚱이 주인의 게으름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는 않는다. 그러니 순서를 바꿔 화장실을 다녀오면 물로 채우고, 그 물이 몸을 돌고 난 후 쌓여 다시 화장실을 가고 싶은 욕구를 만드는 선순환(?)을 완성한다.
<비운만큼 채우기 프로젝트>는 비단 물 마시기에 한정된 건 아니다. 평범한 일상에 크고 작은 행동 강령을 실천 중이다. 요즘 가장 열중하고 있는 건 ’ 체지방을 비우고 그 자리에 근육 채우기’다. 강도보다는 횟수 중심으로 근육 운동을 하고, 식단에 단백질 비율을 높이고 꼬박꼬박 단백질 보조제를 챙겨 먹는다. 바디 프로필을 찍는 몸짱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앞서 걸어간 인생 선배들이나 분명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했을 동년배들의 각기 다른 생체 시계를 보며 더 이상 몸 관리를 미룰 수 없다는 위기감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마치 한 마리 개구리처럼 배는 두둑이 불렀지만 다리는 극세사처럼 가는 불균형적인 모양으로 향하고 있는 내 몸이 두려워서다. 거북이처럼 굽은 목, 굽은 등으로 컴퓨터 모니터나 스마트폰 액정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곧 내 모습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남는 게 없는 가십성 수다, 남 걱정을 가장한 뒷담화, 상처만 남는 선제 방어적 자학을 빼고 그 차라리 침묵을 채운다. 침 튀어 가며 열을 올려 얘기했던 수다의 끝, ‘이렇게 말하는 나는 뭐라도 되는 인간인가?‘라는 질문이 휘갈긴 매서운 따귀 한 방의 결과다. 하는 순간은 세상에 이보다 재밌는 게 있나 싶다. 하지만 수다 메이트들과 헤어져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 허무함과 후회가 두텁게 내려앉곤 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언젠가 분명 내게 돌아올 부메랑 같은 말을 내뱉는 것을 방지하기에 침묵보다 좋은 선택은 없다. 서로에게 마이너스가 될 시간을 나누는 대신 자리에 혼자 하는 운동을 택한다. 요가를 하고, 등산을 하고, 산책을 한다. 공중에 흩어질 덧없는 말 대신, 비록 나만 느껴지는 희미한 등 근육과 동년배에 비해 탄탄한 허벅지 근육이 남는다.
때로는 ’ 비운만큼 채운다 ‘를 ’ 채운만큼 비운다’로 뒤집기도 한다. 새 신발을 사면 손이 덜 가는 오래된 신발 순으로 신발장에서 퇴출한다. 신발장이 터져 나가도록 신발을 모으던 열정은 사그라든 지 오래다. 남들 눈에 좋아 보이는 신발보다 내 발이 편한 신발이 중요하다는 진리를 체감한 이후 생긴 변화다. 발은 두 개고, TPO를 따져 가며 신발을 골라 신을 만큼 활동 반경이 넓지도 않다. 모양보다 편하게 신고 벗을 수 있는 기능의 신발 위주로 재정비됐다. 질 좋은 신발을 아낌없이 신고, 수명이 다하면 보내준다. 아낌없는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쓰레기통에 넣는다.
비우면 채우고, 채우면 비운다. 단순한 이 공식이 없다면 수용할 수 있는 신발의 양은 정해져 있는데도 욕심을 부렸다가 그 안이 혼돈의 카오스가 되는 신발장처럼 내 삶도 엉망이 될 게 분명하다. 여전히 숫자나 수학 기호 앞에서는 신생아처럼 낯을 가리는 타고난 문과형 인간이지만 이 단순한 빼면 더하고 더하면 빼는 행동 공식을 부지런히 실천하며 산다. 복잡한 수학적 계산은 어렵지만 이 산수 정도는 가능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