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변잡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사 Oct 26. 2022

누가 튀기면 신발도 맛있다고 했던가?

나를 유혹하는 평타의 늪


     

저녁 7시에 시작했던 영화가 끝난 건 9시 무렵. 밥을 먹긴 늦었고, 느긋하게 술을 마실 시간 여유는 없었다. 그냥 헤어지기 아쉬우니, 간단히 맥주나 한잔하자는 제안에 번화가에서 멀지 않은 낯선 홍대 뒷골목으로 향했다. 평일 저녁이어서인지 비교적 한산했다. 멀리 맥주 광고판이 보였다.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의 심경으로 다가갔다. 작은 문 앞에 있던 주인인 듯한 중년 여성의 ‘이쪽으로 오세요’라는 호객 멘트를 거부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어느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우리에겐 시간도, 에너지도 없었다. 어디라도 빨리 들어가서 맥주를 마시고 싶었다.      


이 안일한 생각 때문이었을까? 여기서부터 잘못된 게 분명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후문이었고, 작은 호프집인 줄 알았던 가게는 대로변에 위치한 제법 규모가 큰 곳이었다. 한적한 곳을 찾아 굳이 뒷골목으로 온 거였는데 홍대는 홍대였다. 90년대 후반에서 00년대를 주름잡았던 철 지난 가요가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평일 저녁이었는데도 많은 사람이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에서 맥주를 마시며 목소리를 높여가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아 일단 인원수대로 맥주를 시키고 어디서나 평타를 보장하는 메뉴 감자튀김과 돈가스를 주문했다.       


머리를 울릴 만큼 쿵쿵거리는 음악 소리를 뚫어 보려 한껏 목소리 볼륨을 높여가며 간신히 대화를 이어갔다. 곧 긴 머리를 헐렁하게 묶은 남자 종업원이 주문한 음식을 가져와 테이블 위에 올렸다. 도착한 음식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 사이에는 미묘한 눈빛이 오갔다. 음악만 그 시대로 회귀한 게 아니었다. 음식도 2000년대 초반 딱 그 시대였다. 대학로나 신촌 호프집에서 나올 법한 크링클 컷(구불구불한 모양) 프라이에 빨간 케첩이 다였다. 게다가 돈가스는 주방 조명이 어두워 오버 쿡 됐는지도 몰랐는지 한눈에 봐도 딱딱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튀김이 배신할 리가 없지!‘라는 생각에 감자튀김을 포크에 찍어 입에 넣었다.

      

어느 방송에서 한 유명 셰프는 “신발도 튀기면 맛있다”며 튀김 요리를 예찬했다. 재료가 뭐가 됐든 기름에 튀기면 더 맛있다는 의미다. 뜨거운 기름에 재료를 빨리 익혀 식감이 살아 있고, 기름 맛이 더해져 고소한 게 튀김 요리의 매력이다. 하지만 튀긴다고, 기름 샤워를 한다고 무조건 맛있는 건 아니었다.      


혀에서 느껴지는 맛은 딱 2000년 이후 한 번도 갈지 않은 듯한 기름에 쩐 감자튀김이었다. 혹시나 해 돈가스도 맛봤지만, 별반 다르지 않은 컨디션이었다. 호프집에서 주인이 직접 고기를 두드려 만든 수제 돈가스나 생감자 튀김이 나오리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냉동식품조차 제대로 튀기지 못하는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기름을 제때 갈고, 튀김기의 온도 설정 버튼만 잘 누르면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요리가 바로 감자튀김일 텐데 그걸 해내지 못하는 곳이 있었다. 사실, 우리가 간과한 게 있었다. 우리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안주의 맛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취해 있었다. 아마 2차 혹은 3차로 온 게 분명했다. 우리의 입 컨디션만 멀쩡했고, 다른 손님들의 입은 맛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상태였다. 가게 안에 손님은 가득했지만, 안주 맛이 아니라 그저 수다 떨 공간이 필요했던 사람들이었다.      


’쎄함 is 과학’이라고 했던가? 쎄함은 지난 수십 년간 살아오면서 몸으로 체득한 경험의 빅데이터란 말이 딱 맞았다. 2022년이라고는 믿기지 않은 인테리어와 음악, 딱 그 시대에서 잠들었다가 바로 직전에 해동된 듯한 주인과 아르바이트생의 분위기, 메뉴판의 폰트와 가게 내부의 조명까지... 한결 같이 모두 ‘여기는 No!’라고 외치고 있었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조건들이 가득한 곳. 그런데 시간에 쫓겨, 귀찮음에 지쳐 그런 곳에 발을 들이고야 알게 됐다. 이곳이 바로 태어나서 가장 맛없는 감자튀김을 맛본 곳이라는 사실을. 밖에서 사 먹는 튀김은 불패의 요리라 믿고 살았다. 식품계의 석학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었을 냉동식품은 더더욱. 그런데 홍대 뒷골목 예스러운 분위기의 호프집 감자튀김은 이 생각은 지독한 편견이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가진 게 많이 없는 사람에게는 실패할 여유란 없다. 그래서 크고 대단한 성공이 아니라 실패하더라도 데미지가 적은 최대한 안전한 선택을 하고 싶어 한다. 그날 나의 안주 주문이 그랬다. 시간도, 통장도, 체력도 어느 하나 여유가 없으니 이런 선택을 한다. 실패하고 싶지 않아 택한 선택은 이도 저도 아닌 결과로 돌아오곤 한다. 기름에 찌든 감자튀김처럼 맛도 없고, 속도 불편하고 후회만 남는 결과 말이다.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면 감자튀김이 생각날 거 같다. 맛없는 감자튀김을 씹으며 평타의 늪에 두 번은 빠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떠올릴 거다. 내 인생에 최악의 감자튀김은 한 번으로 충분하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해 봐!'라는 말의 무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