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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pr 26. 2023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

좋아하던 게 다 귀찮아진 상태라면?

새벽부터 시작한 일이 영종도에서 마무리됐다. 올 때는 집합 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철 첫차를 타고 도착했다. 하지만 녹초가 된 상태로 러시아워 지하철에 몸을 다시 구겨야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두 눈이 자동으로 질끈 감겼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조금만 가면 인천공항. 그래 공항버스를 타자. 자차를 가져온 분께 염치 불고 하고 인천공항까지만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덕분에 빠르고 편하게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엉덩이에서부터 느껴지는 익숙한 도로감에 하루 종일 부슬비를 맞으며 종종거리느라 생긴 피곤도 사라졌다. 인천공항. 간판을 보는 순간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게 얼마 만에 인천공항이야?      

(일 때문이었지만) 매달 한두 번씩 인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게 일이었던 시절도 있다. 일이 아니어도 적어도 1년에 1~2번은 인천공항에 왔다. 프로젝트를 끝내고 나면 너덜너덜한 심신을 치유(?) 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하고 싶은 일 하나를 하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 50개쯤은 해야 하는 일상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시간과 통장이 허락하는 한 오래 그리고 먼 곳으로 떠났다. 그 흔적은 고스란히 여권 도장에 남았다. 여권을 들고 마지막으로 온 게 코로나19로 하늘길이 막히기 전이었으니 그사이 뉴스에서나 보던 인천공항이 신기했다. 설렘은 설렘이고 지친 몸을 얼른 집으로 가는 공항버스에 태우고 싶었다. 늘 타던 도착층의 경기행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으잉? 몇 바퀴를 돌아도 그 자리에는 아무 표시가 없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재빨리 검색창을 열었다. 아! 이럴 수가!     


내가 도착한 곳은 제2 여객터미널이었다. 그전까지는 늘 제1 여객터미널에서만 탔었기 때문에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제2 여객터미널의 공항버스 타는 곳은 고속버스터미널 같은 구조였다. 대합실 전광판에 출발 시간이 표시되고, 키오스크에서 티켓을 살 수 있었다. 티켓을 사면 외부에 연결된 승차장에서 버스를 타면 된다. 구조는 파악했고, 이제 날 집으로 데려다줄 버스틀 타면 된다. 2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푹신한 공항 리무진에 반 누운 상태로 갈 생각에 신이 났다. 내적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둠칫둠칫 어깨춤을 추며 키오스크로 향했다. 지역을 선택하고, 내가 내릴 정류장을 클릭하니 예약 가능한 시간들이 주르륵 표시됐다. 엉? 그런데 가장 빠른 시간이 1시간 반 후였다. 아... 코로나19!!!!!!!!!!!!!! 망할 놈의 역병이 돌기 전이라면 30~40분마다 한 대씩은 있었는데 코로나 19가 다 엉망으로 만들었다. 평소 컨디션이라면  이쯤이야 ’오히려 좋아 공항을 더 누릴 수 있으니까!‘라고 생각했다. 멍을 때리거나 책을 읽으며 기다리겠지만 지금은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 빨리 집에 가서 누워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시켜야 한다. 편하게 가려다가 오히려 더 멀리서 돌아가게 생겼다.      


공항철도를 타는 곳까지 터덜터덜 걸었다. 다시 공항철도에 몸을 맡기고, 서울역까지 갔다. 거기서 다시 전철로 갈아타고 내가 사는 경기도까지 두 시간 반이 넘게 러시아워 물결에 휩쓸려 이리저리 요동쳤다. 바닥까지 긁어 쓴 탓인지 눈에 연료 없음을 알리는 빨간불이 깜빡이기 직전, 집에 도착했다. 내 방문을 여는 순간 그간 쌓였던 피로와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며 쓰러지듯 바다게 뻗었다. 천장 위의 형광등은 분명 긴 막대기 모양인데 내가 하루종일 밖에 있는 사이 프로펠러라도 추가 장착했는지 빙글빙글 돌았다. 옷도 벗지 못하고 그대로 2시간쯤 미라처럼 누워 있었다. 숨만 붙어 있을 뿐 꼼짝할 수 없었다.      


공항에 가고 싶을 때는 마이 언트 메리의 <공항 가는 길>을 듣는다. 공항에 가고 싶을 때마다 공항에 가기에는 시간과 돈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대신 노래를 듣는다. 눈을 감고 <공항 가는 길>을 들으면 분명 나는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는데 기분만큼은 공항버스 안에 타고 있는 진동과 냄새가 느껴진다. 가사에 고스란히 담긴 낯선 땅으로 향하는 출발점인 공항으로 향할 때의 설렘과 불안조차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아무도 없는 파란 새벽에
차가운 바람 스치는 얼굴
불안한 마음과 설렘까지
포기한 만큼 넌 더 이상 쓰러지지 않도록   

또 다른 길을 가야겠지만
슬퍼하지는 않기를
새로운 하늘 아래 서 있을
너 웃을 수 있도록   

어색한 미소 너의 뒷모습
처음 사랑이던 너의 얼굴
이젠 익숙한 공항으로 가는 길     
불안한 마음과 그 설렘까지도
포기한 만큼 너 더 이상 쓰러지지 않도록

 마이 앤트 메리(My Aunt Mary)의 <공항 가는 길> 中


하지만, 체력이 없는 상태에서 그 좋아하던 공항도, 공항버스도 아무 소용없었다. 공항 특유의 낭만과 감성을 누리기에는 내 체력은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일 오전부터 빡빡한 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밥 달라고 울어 재끼는 입을 쫙 벌리고 제비 새끼들 같은 업무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었다. 콩나물시루 같은 퇴근길 지하철에 실려 가면서 내가 생각했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날 만큼 좋아하던 게

다 귀찮아진 상태라면

지금까지 온 길을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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