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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y 02. 2023

한때는 소중했지만 이제는 짐처럼 느껴진다면?

엘사의 계절은 가고

아직 어둠이 다 사라지지 않은 새벽, 집을 나서기 위해 대문을 열었다가 심장이 툭 하고 떨어졌다. 앞집에서 내놓은 쓰레기봉투 사이에 금발 머리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 깜짝이야!     


자세히 보니 유치원 아이 몸집 정도의 대형 엘사 인형이었다. 트레이드 마크인 푸른색 드레스는 없고 분홍색 실내복 차림이었다. 비록 편한 차림이었어도, 또 누군가에게 버림받았어도 여왕 특유의 힘 있는 눈빛은 여전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을 엘사는 이제 어깨에 폐기물 처리 스티커를 붙인 채 쓰레기수거차를 기다리는 신세다. 우리 동네 쓰레기 수거 차량은 오전에 도니 퇴근했을 때는 사라지겠지 생각하니 엘사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싶어졌다.      


그동안 고생 많았고, 잘 가!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저녁 8시, 떡이 된 몸을 질질 끌고 집으로 들어가며 보니 엘사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자신을 둘러쌌던 다른 쓰레기봉투들은 다 사라졌는데 엘사만 홀로 남았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엘사는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고, 힘없는 호위무사 같던 쓰레기봉투만 바뀌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아침저녁, 엘사의 안부를 확인하게 됐다. 지나가던 장난기 많은 사람에게 해코지당하는 건 아닌지, 산책 나온 개들의 소변 세례를 받는 건 아닌지 출퇴근할 때는 엘사의 얼굴과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실내 생활을 해왔을 엘사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험한 바깥 생활 일주일 차가 되자 머리는 산발이 됐고, 거뭇거뭇한 먼지가 쌓였다. 겨울왕국을 호령하던 여왕은 영락없는 거지꼴이 됐다. 고작 7일 만에 거지가 된 여왕. 불과 일주일 만에 생긴 변화다. 길거리 생활이 얼마나 고된지 엘사를 보며 다시 한번 느꼈다. 쇠락한 왕국의 충성스러운 신하처럼 아침저녁으로 엘사 여왕에게 안부 인사를 물은 지 일주일이 좀 넘었을 무렵, 여왕은 사라졌다. 앞집 대문 앞에 본드라도 붙여 놓은 듯 꼼짝하지 않던 엘사 여왕이 먼 길을 떠났다. 아마 여왕은 황금마차 대신 대형 폐기물 수거차를 타고 폐기물 집하장으로 떠났을 거다. 여왕이 떠난 자리는 말끔했다.      


떠난 여왕이 걸어온 길을 상상해 봤다. 중국 어느 공장에서 태어나 배에 실려 한국에 도착했을 여왕. 어느 물류 센터를 거쳐 온라인 쇼핑몰이나 오프라인 장난감 가게에서 잠시 머물다 앞집으로 왔겠지?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그 풍채를 생각했을 때, 분명 구하기 힘든 선물이었을 거다. 선물을 받고 세상의 전부를 얻은 듯한 기쁨을 느꼈을 전주인의 얼굴을 생각하니 여왕의 마지막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다. 잠시였겠지만 충분히 사랑받고, 오래 방치됐을 여왕. 결국 뭐든 끝은 오게 마련이다. 세상 전부였던 것도 언젠가 자리만 차지하는 짐 덩이로 전락하는 건 ’ 일순간‘이다. 그 시작이 화려하고 대단해도 결국 끝은 쓰레기장이다.      


엘사의 계절이 끝났다. 여왕이 떠난 자리를 차지한 건 뭐였을까? ’ 렛잇고‘를 열창하던 꼬마는 자라 어느새 사춘기 소녀가 되었을 테니 아마도 아이돌? 아니면 새 이성 친구? 뭐가 됐든 또 다른 기쁨의 주체들에 휩싸여 있을 게 분명하다. 새로운 게 오면, 오래된 것들은 자리를 내줘야 한다.      


유독 쌀쌀했던 봄 날씨 때문에 미뤄뒀던 옷장 정리를 이제야 했다. 겨우내 입었던 옷들을 정리하면서 몇 년째 손 한 번 대지 않았던 옷들을 추렸다. 앞집 꼬마에게 엘사의 계절이 끝났다면 내겐 보풀 잔뜩 일어난 두툼한 와이드 팬츠와 얼굴을 시멘트 톤으로 만드는 겨자색 터틀넥의 계절이 끝났다. 살 때 만해도 최고의 안목,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던 옷들도 마음이 식고,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내 마음처럼 손도 닿지 않는 옷장 깊숙한 곳에서 발굴해 헌 옷 수거함으로 보냈다. 출시 당시의 가격표의 화려함은 빛바랜 역사가 되고, 그저 kg당 몇백 원 헐값에 팔려 먼 나라로 떠날 거다. 부디 그곳에서 필요한 사람들의 품으로 들어가길 기도하는 게 내 마지막 배려였다. 어디 옷뿐일까? 관계의 계절도, 습관의 계절도, 다짐의 계절도 언젠가는 끝이 보인다. 자리만 차지하는 커다란 짐 같은 것들을 정리하면 간소하고 쾌적한 마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뭐든 한때는 소중했고, 지금도 고맙지만 짐처럼 느껴진다면 정리가 필요하다는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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