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스타일에 대하여
한 달 전, 뿌리 염색을 위해 미용실에 갔을 때였다. 다음 텀에는 거지 존에 다다른 머리카락을 정리해야 할 타이밍일 테니 어떤 머리를 하면 좋겠냐고 담당 미용사에게 상의했다. 염색약을 바르던 손을 멈추고 거울 안의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던 미용사는 말했다.
“여름이면 역시, 히피펌이죠.”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한 중단발을 지나고 있는 내 머리 길이에서 히피펌이라니. 자고로 히피펌이란 자유의 상징이자, 여리여리 청순함을 대표하는 스타일. 몇 해 전부터 귀여운 푸들 같은 히피펌을 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과감하고, 도전적인 선택을 부러워만 했지 내 선택지에 히피펌을 넣은 적 없다. 최소 날개뼈까지는 닿을 긴 머리여야 어울리지 않을까? 주저하는 나를 위해 미용사는 단발 히피펌도 많이 한다는 말과 함께 얼른 손을 닦고 레퍼런스 사진을 보여줬다. 스마트패드 속 히피펌을 한 러블리한 연예인들의 얼굴에 나를 대입해 봤다. 역시나 어울리지 않았다.
“제가 이 상태로 히피펌 하면 그런 스타일 있죠? 예민미 폭발하는 미치광이 작가 같을 거 같아요”
내 말을 들은 미용사는 빵 터졌고, 옆에서 돕던 어시스턴트도 풉 하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직업별로 미디어에 나오는 상징적인 이미지가 있다. 백수는 무릎 부분이 발사 직전인 운동복에 슬리퍼를 신고 머리는 덥수룩하다. 재벌 3세 실장님은 빈틈 하나 없이 꼭 맞는 슈트에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는 깔끔한 스타일이다. 정치인은 무채색 양복에 신뢰를 주는 2:8 가르마고, 시골 할머니는 꽃무늬 일바지에 뽀글 파마다. 미디어의 영향으로 내 머릿속에도 ‘작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두꺼운 뿔테안경을 낀 푸시시한 긴 히피 펌 스타일이 떠오른다. (중간중간 머리를 둘둘 말아 펜을 비녀처럼 꽂아 고정시킨 채 딱따구리처럼 따닥따닥 톡 쏘는 말을 해대는 클리셰는 덤)
바뀐 환경, 과중한 업무, 넘치는 생각, 시도 때도 없는 눈치 보기 등등 예민함이 차곡차곡 쌓여 몸이 고장 났다. 인후염에서 출발해 구내염과 혓바늘의 대환장 파티가 벌어진 후 일주일 만에 4kg이 빠졌다. 작가도 맞고, 이렇게 성향이 예민한 것도 맞으니 히피펌까지 하면 미디어가 만든 ‘작가’ 캐릭터의 전형적인 스타일 3박자를 다 갖춘다. 그야말로 스트라이크! 그런 뻔한 전개는 식상하게 느껴졌다.
일의 파도가 한바탕 지나가고, 초토화됐던 입안과 컨디션이 조금 회복됐을 무렵 미용실로 향했다. 오래 미뤄둔 숙제를 하는 심정으로 미용실 의자에 앉자마자 말했다.
“펌 해주세요. 단정한 스타일로요. 아무리 생각해도 히피펌은 무리예요.”
“손님은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오래 봐온 미용사는 역시 나를 잘 안다. 과감한 스타일 변신 보다, 안정적이고 무난함을 택할 거란 걸 딱 맞췄다. 3시간 후 길이는 유지하면서 상한 머리끝은 잘라내고, 아래쪽에 컬을 살린 스타일이 완성됐다. 제멋대로 뻗치기 일쑤였던 머리가 단정하게 정리됐다. 툭툭 털어 말린 후 드라이로 아래쪽에 볼륨만 주면 컬이 살아나는 지금까지 수없이 해왔던 스타일을 ‘또’ 했다.
마음속에서 삐죽삐죽 자라나는 예민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무난한 헤어 스타일 속에 차곡차곡 숨긴다. 치열한 전쟁이 한창인 머릿속을 티 내고 싶지 않아 차분한 헤어 스타일로 가린다. 자꾸만 가라앉는 기분을 끌어올리려 볼륨 빵빵한 컬을 강조한 헤어 스타일을 재탕한다. 이미 몸 안팎에 예민미 폭발하는 미치광이 작가인데 머리카락까지 그 장단에 맞추는 건 과하니 적당히 중화시키는 게 필요하다. 그래서 작가로 사는 한 아마 이번 생에 내게 히피펌은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