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일상에 레몬을 끼얹으면 생기는 일
평소에 사지 않던 레몬을 산 건 굴러 들어온 아보카도 때문이었다. 달걀 프라이를 얹어 아보카도 비빔밥을 해 먹고도 남은 4개의 아보카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초록색이던 껍질이 까맣게 변한다는 건 후숙이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다. 눌렀을 때 말랑해졌다는 건 아보카도가 먹기 좋을 만큼 익었다는 뜻이다. 말랑이는 아보카도의 신호를 그냥 넘길 수 없어 일단 포털 사이트에 아보카도 활용 요리를 검색했다. 맨 위에 나오는 건 멕시코 소스, 과카몰리. 으깬 아보카도에 각종 채소를 넣어 버무린 소스다. 빵 위에 얹어 샌드위치로 먹을 수도 있고, 나초칩을 찍어 먹기도 한다. 남은 아보카도는 과카몰리로 소진하기로 결정했다. 냉장고 속 재료들을 머릿속으로 스캔했다. 토마토, 양파, 소금, 후추까지 거의 모든 재료가 있다. 딱 하나만 빼놓고.
과카몰리를 만들 때 필요한 재료 중 없는 건 바로 ‘레몬’. 대한민국 가정 중 레몬을 상비해 두고 사는 집은 몇이나 될까? 최근에는 이전보다 많아졌겠지만 일단 우리 집은 아니다. 일상적으로 우리 집에 레몬이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다. 레몬이 집에 들어오는 이유는 단 두 가지로 압축된다. 누가 주거나 아니면 어쩌다 시장에 갔는데 레몬이 미친 듯이 싸서 레몬 청을 만들겠다고 엄마가 사 올 때. 이 두 가지 이유가 아니라면 레몬이 집에 굴러 들어오는 일은 없다.
지금껏 먹어 본 과카몰리에서 레몬의 존재는 확실했다. 느끼할 수 있는 아보카도의 맛을 상큼하게 정리해 주는 것! 그게 바로 레몬의 역할이었다. 그러니 레몬을 빼고 과카몰리를 만들 순 없었다.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 마트에 들렀다. 내게 선택지는 많았다. 생레몬을 살 것인가? 병에 담긴 레몬즙을 살 것인가? 전에 공산품 레몬즙을 샀지만 몇 번 안 쓰고 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같은 후회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과일 코너로 향했다. 여기서 다시 선택지가 나왔다. 3개짜리가 2800원 vs 8개짜리가 4000원. 내가 필요한 레몬은 1~2개뿐이지만 8개짜리의 가격을 알고, 3개짜리를 사기 망설여졌다. 결국 장바구니에 들어간 건 8개로 포장된 레몬이었다.
묵직한 레몬 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 싱크대 위에 레몬을 올렸다. 앞으로 레몬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2800원에 3개를 사면 손해 보는 것 같아 덜컥 8개에 4000원짜리를 샀다. 필요한 양보다 많이 사 오긴 했는데 이 레몬을 어떻게 소진해야 할까? 냉장고에 넣는 순간, 까맣게 잊을 게 뻔하다. 자유를 꿈꾸는 무기수처럼 평생을 냉장고 채소 칸에서 뒹굴며 탈출을 꿈꾸다 수분은 다 날아가고 쭈글쭈글해진 상태로 사망 직전 냉장고 밖으로 나와 음식물 쓰레기 봉지로 직행할 거다. 레몬으로 태어나 음식으로 완성되지 못하고 쓰레기가 된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뭐가 될지 모르지만 일단, 굵은소금과 베이킹 소다로 레몬을 박박 씻었다. 식초물에 잠시 반신욕을 시켜 준 후 뜨거운 물로 마지막 샤워까지 마쳤다. 각종 화학 약품들을 씻어 내기 위한 절차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바구니에 들어간 레몬이 갓 목욕을 하고 나온 아이처럼 말간 얼굴로 방긋 웃었다. 바구니 가득 쌓인 레몬 중 크고 싱싱한 걸 골라 과카몰리용으로 빼뒀다. 나머지 레몬은 잘랐다. 얇게 슬라이스도 하고, 4등분 해 즙을 짜기 좋게 잘랐다. 그리고 쟁반에 종이 포일을 올리고 가지런히 펼친 후 냉동실에 넣었다. 그렇게 레몬 얼음이 완성됐다.
한동안 내가 하는 거의 모든 요리에 레몬이 들어갔다. 과카몰리에 레몬즙을 듬뿍 넣는 건 기본, 새우를 넣은 오일 파스타도 마지막에 레몬 슬라이스를 넣고 살짝 볶았다. 레몬향이 새우의 비린내를 잡아줬다. 병아리콩을 삶아 각종 채소와 버무린 샐러드에도 레몬을 잘게 잘라 넣었다. 사태찜을 만들고 찍어 먹을 간장 소스에도 레몬 즙과 조각을 아낌없이 넣었다. 중간중간 씹히는 레몬 과육은 레몬즙을 넣었을 때보다 상큼함이 폭탄처럼 터졌다.
한동안 내가 하는 거의 모든 요리에 레몬이 들어갔다. 과카몰리에 레몬즙을 듬뿍 넣는 건 기본, 새우를 넣은 오일 파스타도 마지막에 레몬 슬라이스를 넣고 살짝 볶았다. 레몬향이 새우의 비린내를 잡아줬다. 병아리콩을 삶아 각종 채소와 버무린 샐러드에도 레몬을 잘게 잘라 넣었다. 사태 찜을 만들고 찍어 먹을 간장 소스에도 레몬즙과 조각을 아낌없이 넣었다. 중간중간 씹히는 레몬 과육은 레몬즙을 넣었을 때보다 상큼함이 폭탄처럼 터졌다.
가장 자주 사용하는 건 ‘레몬 물’. 컵에 언 레몬을 넣고 물을 따른다. 물에 레몬 향과 맛이 우러나면 마신다. 끝. 다이어트나 미용에 좋다는 말은 들었지만 레몬물을 챙겨 먹기는 처음이었다. 단지 슬라이스 한 조각이 들어갔을 뿐인데 꽤 레몬의 풍미가 진했다. 밋밋한 물이 레몬 한 조각으로 상큼해졌다. 종종 식당에서 주는 레몬 물을 먹을 때 형체도 흐믈흐믈하고, 다 해진 레몬 조각을 볼 때 얼마나 오래 이 물 안 잠겨 있었을까? 생각했다. 수없이 재탕했을 레몬 물이 아니라 매일 아침 새 레몬 조각을 넣은 신선한 레몬 물을 마신다. 기분 탓일까? 레몬물을 먹은 후부터 얼굴빛이 환해진 느낌적인 느낌이다. 매일매일 레몬물까지 마셔대니 산처럼 쌓였던 레몬은 일주일 만에 바닥이 났다. 언제 다 쓰나 싶었던 레몬도 끝이 보인다.
4000원 치고 꽤 오래 레몬이 주는 기쁨에 취해 살았다. 늘 먹던 음식에 레몬을 하나 끼얹었을 뿐인데 꽤 상큼하고, 고급진 맛이 났다. 뻔한 일상이었을 뿐인데 레몬 덕분에 기분까지 산뜻해졌다. 숙제 같았던 산더미 레몬을 일상 구석구석에 흩뿌려 놓으니 괜찮은 사람이 된 기분이다. 물을 하나 마셔도 레스토랑에 온 기분이고, 건강을 꽤 챙기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맛과 향, 색깔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레몬처럼 사소하지만 빠르고 확실하게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는 건 의외로 많다. 다만 내가 넘기고 지나쳤을 뿐. 주변을 돌아본다. 뭘 그렇게까지 하나 싶어 넘겼던 것들 중에 레몬 같은 존재가 있지 않을까? 필요 없을 거 같아서, 귀찮아서, 번거로워서 넘겼던 많은 것들이 가진 가치와 의미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내게 필요한 걸 고르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