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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un 12. 2023

한국인의 디저트, 후식 볶음밥

슬프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위장의 현실

토요일 점심, 특별한 일이 없다면 부모님과 외식을 한다. 무탈한 일주일을 보낸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시간이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내게 엄마가 점심에 뭘 먹을지 메뉴를 정하라고 한다. 뭐가 좋을까? 돼지고기는 전날 먹었고, 소고기는 부담스럽고, 중국 음식은 어제 아빠가 드셨다고 한다.      


그럼, 막국수 어때?


집 밖으로 나서니 뜨거운 공기가 얼굴에 확 와닿는다. 완연한 여름이다. 오후 늦게 비가 온다고 했는데 여름 하늘은 눈부시게 화창했다. 엄마, 아빠와 느릿느릿 걸으며 15분 거리의 막국숫집으로 향했다. 막국숫집 간판이 눈에 보일 만큼 가까워졌을 때, 아빠가 말했다.      


닭갈비 먹자.      


네? 갑자기 닭갈비요? 계획형 인간인 내 혈압이 빠르게 오르는 게 느껴졌다. 저혈압이니 다행이다. 처음부터 닭갈비를 먹자고 했다면 조용히 따라갔을 텐데, 막국수를 먹자고 막국수 집에 거의 다 와서 닭갈비라니. 하지만 아빠 딸로 4N년을 살았으니 이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안다.  

    

닭갈비? 알았어.

그래 조금만 더 가면 닭갈빗집 있어 거기로 가자.


아빠는 막국수를 먹기로 하고 출발했지만 가는 내내 막국수를 생각하다 영혼의 짝꿍, 닭갈비에 닿았을 게 분명하다. 막국수 집에서는 막국수만 먹을 수 있지만, 닭갈빗집에 가면 닭갈비와 함께 막국수도 먹을 수 있으니 합리적 선택이 아닌가?      


5분 더 걸어 닭갈비 집에 도착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토요일 점심부터 닭갈비를 먹고 있었다. 우리도 그사이에 자리를 잡고 주문했다. 쫄면 사리를 넣은 뼈 없는 닭갈비 2인분에 물막국수. 내가 시킨 건 그게 다였다. (아! 나중에 맥주도 한 병 추가했다.)      


기분 탓일까? 아니 정확히는 물가 탓이겠지. 세숫대야보다 큰 철판 위에 산처럼 쌓아주던 닭갈비는 사라졌다. 닭고기양은 그렇더라도 양배추와 고구마, 떡, 깻잎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그걸 손님 앞에서 볶아 주던 퍼포먼스(?)도 없다. 주방에서 거의 다 볶아 나와 숨이 죽은 작고 귀여운 양의 닭갈비가 우리 앞에 놓였다. 빠르게 먹을 수 있어 좋긴 했지만 ‘보는 맛‘이 없어 허전했다. 숨이 죽어 납작한 닭갈비를 보고 셋이 이걸 먹고 배가 찰까 싶었다.      


신상 맥주로 먼저 목을 축였다. 그리고 닭갈비로 돌진했다. 한 점, 두 점 아무것도 곁들이지 않고 닭갈비 본연의 맛을 즐겼다. 이후에는 상추와 깻잎에 싸서 먹고, 쫄면 사리에 둘둘 말아먹고, 막국수 면 위에도 올려 먹었다. 닭갈비를 3/2쯤 먹었을 때,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한다. 한국인의 후식, 볶음밥을 몇 개 볶을 것인가? 인원수대로 볶을까? 아니면 인원수 –1을 해야 하나? 여러 의미를 담아 부모님께 의견을 물었다.     


볶음밥.... 주문해?     


두 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은 닭갈비까지 먹을 걸 생각하면 볶음밥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볶음밥 주문은 하지 않기로 하고, 남은 닭갈비를 먹으며 씁쓸한 기분이 몰려왔다. 언제부터 내 위는 후식 볶음밥을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걸까? 한참 목구멍이 열렸을 때는 인원수대로 볶음밥을 시키고도 모자라 바닥이 구멍 나기 직전까지 밥알들을 싹싹 긁어먹었었는데...      


얼마 전, 구내염 폭격 속에서도 먹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선택한 즉석 떡볶이! 그 사랑하는, 즉떡을 먹은 후에도 후식 볶음밥까지 먹지 못했다. 감자탕을 먹고도 후식 볶음밥을 주문하지 못했다.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못 먹다니... 후식 볶음밥 패스 3연타를 겪고 나니 왠지 모를 패배감에 젖었다.      


한국인에게 후식 볶음밥이란 어떤 존재인가? 원재료와 양념이 오랜 시간 섞이고 졸여진 맛이 압축된 맛의 정수이자 한식 코스의 화룡점정. 제아무리 푸짐하고 화려한 닭갈비, 즉석 떡볶이, 감자탕도 그저 볶음밥을 먹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런데 위장이 낡고 늙어서 후식 볶음밥을 품을 수 없다니... 현실이 야속했다.      


먹는 동안 졸여진 국물에 김치나 다진 채소를 넣고 볶다가 김 가루와 참기름으로 마무리 한 볶음밥. 냄비나 팬에 넓게 펴 누룽지 상태로 만들어 박박 긁어먹을 때의 성취감(?)과 쾌감은 그 어떤 음식도 대체할 수 없다. 닭갈비로 배가 꽉 찼지만 어딘가 모르게 기분은 헛헛했다. 문장을 쓰고 마침표를 찍지 않은 느낌이었다.      


짐승 같던 소화력도 예전 같지 않고 얼마 먹지 않고도 배가 찬다. 본 음식을 목젖 끝까지 차도록 먹고도 볶음밥은 물론 디저트까지 먹었다. 이제 내 몸뚱이는 그런 과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슬픈 현실을 타개할 방법은 있다. 이제 후식 볶음밥을 먹고 싶다면 본 음식의 주문 양을 줄이는 방법을 쓰면 된다. 위장은 낡았어도 음식을 향한 욕망은 사그라지지 않는 계획형 인간의 ’ 꼼수‘는 점점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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