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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un 14. 2023

바닥까지 쓴 크림처럼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 것들

내가 믿고 기대는 존재에 대하여


책이었는지, 인터넷에 떠도는 글이었는지 정확한 출처는 기억나지 않는 문장이 있다. 읽는 순간 커다란 물음표로 내 양 볼에 불꽃 따귀를 갈긴 그 문장을 휴대전화 메모장에 적어뒀다.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 건
바닥까지 긁어 쓴 크림이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두 가지 물음표가 동시에 나를 덮쳤다. 첫 번째는 대체 어떤 대단한 효과를 가진 크림일까? 싶어 크림의 브랜드와 제품명이 궁금했고, 두 번째는 바닥까지 긁어 쓴 크림처럼 내게 배신하지 않는 건 뭐가 있을까? 였다.      


무수히 많은 화장품 중 바닥까지 긁어 썼다는 건 사용하는 동안 크건 작건 효과를 봤다는 의미이다. 충성하듯 열심히 바른 발라야 바닥을 마주하게 된다. 새 화장품을 뜯을 때는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과연 이 친구와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막상 뚜껑을 열었는데 피부와 맞지 않을 수 있다. 향이 진할 수도 있고, 발림성이 별로일 수 있다.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할 수도 있고, 마음이 변해 다 쓰기도 전에 새 제품을 데려오기도 한다. 그래서 바닥까지 긁어 쓴다는 건 이 무수한 고비들은 넘은 후에 펼쳐지는 일종의 해피엔딩이다. 배신과 변심이 들끓는 고비 많은 세상에서 바닥까지 긁어 쓴 크림처럼 나를 배신하지 않는 건 뭐가 있을까?  

    

참치액

누군가에게 절대 배신하지 않는 존재가 바닥까지 긁어 쓴 크림이라면 나에게는 바닥까지 탈탈 털어 쓴 참치액이 있다. 가다랑어포(가쓰오부시) 농축액에 다시마, 무 따위의 추출액과 식염을 섞어서 만든 액상 조미료인 참치액. 나의 요리 생활은 참치액을 알기 전과 후로 나뉜다. 미역국에도, 오일 파스타에도, 콩나물무침에도, 달걀말이에도 뭔가 맛이 2% 부족하다 싶으면 가차 없이 참치액 뚜껑부터 딴다. 조선간장보다는 산뜻하고, 소금보다는 묵직하면서도 멸치액젓보다는 깔끔한 그 오묘한 감칠맛에 취해 내 요리의 필수품이 된 지 오래다. 조미료라는 단어가 주는 은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 참치‘라는 신선하고 건강한 이미지의 이름으로 덮는다. 아무리 망한 요리라도 푸른 바다를 헤엄치는 거대한 참치가 지느러미 끄트머리는 스치고 갔을 조미액 몇 방울에 심폐 소생이 가능하다. 참치액, 어디까지 넣어 봤니? 수준으로 국과 탕, 찌개 같은 국물 요리는 물론 볶음 요리, 양념장, 무침 요리에도 참치액을 넣는다. 참치액이 남아 있는 한, 아직 실패한 요리는 없다.      


산책

하루에 최소 1시간, 많으면 2시간 가까이 산책을 한다. 비가 오거나 미세먼지가 심한 날을 빼면 추워도 더워도 나간다. 나의 산책 루틴은 단순하다. 일이 있다면 일을 다 끝내고 운동화를 신고 이어폰과 핸드폰만 챙겨 나간다. 일이 없다면 여기에 에코백에 추가로 지갑과 책을 넣어 나간다. 책이 없을 때는 집 근처 개천 변을 따라 라디오나 팟캐스트를 들으며 걷다가 기점으로 찍어 둔 반환점을 돌아 집에 온다. 책이 있을 때는 기점 근처의 카페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하며 책을 읽고 돌아온다. 이럴 때는 보통 커피 마시며 책 읽는 시간까지 합치면 3~4시간은 훌쩍 넘는다. 생각이 많은 편인 나는 걸으면서 걸음마다 생각을 버린다. 틀어박혀 있었다면 생각을 쇠똥구리처럼 굴리다 머리가 터져 나간다. 그런 상태가 되지 않으려고 일부러 나가 걷기 시작한 게 이제는 루틴을 넘어 생활의 일부가 됐다. 무거워진 머리를 이고 지고 산책을 나갈 때, 벌써 발걸음이 가볍다. 산책을 가면 난 길에 머릿속을 활활 태우는 생각들을 버리고 올 테니 한결 가벼운 기분으로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 쓴 크림 통에 손이 닿을 때의 쾌감처럼, 산책용 운동화가 닳아 새 운동화를 사라는 신호를 보내면 묘한 짜릿함이 차오른다.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 결과를 안겨주는 산책을 그만큼 충실히 잘했다는 의미로 받는 일종의 ’참 잘했어요 ‘ 도장이다.      


경험

실패하느니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다. 30대 중반까지 내 삶의 모토였다. 승산 없는 게임이라면 아예 마운드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 최소 무승부 이상의 결과가 눈에 보여야 시작했다. 남 눈치를 많이 보고, 누군가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편인 난 누가 시키지 않는 한 스스로 뭔가 나서서 하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필요했고, 내가 납득하지 않으면 움직이길 마다했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나이가 쌓여 가면서 세상은 경험을 원했다. 과거의 경험으로 오늘의 나를 평가했고, 미래의 나를 예측했다. 경험이 없는 사람이 나이 들면 연륜은 없는 낡은이가 된다는 걸 보고 배우고 느꼈다. 우연히 발 담그게 된 오지 프로젝트의 첫 경험이 두 번째, 세 번째를 넘어 다양한 오지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한 번의 경험이 있었기에 ’ 오지 경력자(?)’가 됐다. 생각 없이 올레길을 걸어 보니 한라산도 오를 수 있게 됐고, 매주 산에 오르며 허벅지를 불태우며 근육을 키우게 됐다. 모든 시도가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시도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지만, 시도하면 실패하더라도 경험은 남는다. 지금도 새로운 시작 앞에서는 두렵고, 심장이 쿵쾅거린다. 어떤 결과를 맺을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시작하면 경험은 남고, 나를 배신하지 않는 그 경험은 언제든 써먹을 수 있는 삶의 재료가 된다. 그 믿음을 안정제 삼아 새로운 시작 앞에 쿵쾅이는 가슴을 도닥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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