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멈추지 않게 만들기 위한 속이기 대작전
며칠 전 집에 바나나 한 송이가 굴러들어 왔다. 더운 날씨에 4인 가족이 초파리가 생기기 전, 빠르게 해치우기란 불가능한 양이었다. 바나나를 싱싱하게 보관하는 방법을 찾아 인터넷을 뒤졌다. 여러 팁이 있었지만 그중 내 시선이 멈춘 곳은 바나나를 착각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이름하여 바나나 속이기 전법! 바나나를 바닥에 내려놓기보다는 공중에 매달아 놓으면 바나나가 나무에 매달려 있다고 착각해서 느리게 익는다는 논리였다. 의심 많은 나는 다시 검색창을 뒤졌다. 정식 바나나 걸이 제품부터 옷걸이, 끈, 빨래 건조대, S자 고리 등 매달릴 수 있는 모든 곳에 매달려 공중 부양한 바나나 사진을 확인했다. 시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 느리게 익어 간다고 했다. 분명 나무에서 떨어져 나와 포장지 옷을 입고 배에 실려 바다 건너왔는데 인간이 고작 며칠 공중에 매달아 놨다고 아직 나무에 매달려 있다고 착각하는 바나나라니... 그런 바나나가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싱싱한 걸 먹겠다고 자연의 순리를 역행시키는 인간들의 욕심에 바나나는 평화롭게 눈감지 못하는구나 싶어서.
바나나의 보관 기한을 늘리기 위해 공중에 매달아 놓으니 쉽게 무르지 않는 바나나를 보며 생각했다. 바나나를 속이듯 지금 나도 뭔가 꾸준히 오래 무언가를 하기 위해 나를 속이는 방법을 시도할 타이밍은 아닐까?
일단 꾸준히 하고 싶은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운동. 어릴 때 운동은 여유 있는 사람들이 예쁜 몸매를 갖기 위해 투자하는 고통의 시간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둘 몸 구석구석이 고장 나기 시작하면서 알게 됐다. 운동은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예쁜 몸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살려고 하는 거였다. 사람답게 살려고. 틈이 나서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틈을 내서 운동을 한다. 근육이 생기고 곧은 자세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운동을 하는 동안 불필요한 감정 분산을 차단하고 나에게 집중한다. 할 때마다 실패하다가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한 끝에 성공하는 요가의 ‘머리 서기’처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대회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공식 기록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내 힘으로 뭔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이면 충분하다. 내일 다시 실패하더라도 오늘 성공했다는 그 기쁨이 한동안 활력이 된다. 주말 새벽, 아무도 가지 않은 산길을 올라 정상에 올라갔을 때의 희열은 일주일을 또 살아갈 동력이 된다. 바나나 속이기 권법을 벤치 마킹하면 산에 오르거나, 하누만 아사나(일명 다리 찢기) 할 때마다 느끼는 허벅지가 찢어질 거 같은 통증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단단한 근육이 차오르는 늘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통증 또한 반갑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운동과 함께 오래 하고 싶은 또 하나는 ‘글쓰기’다. 일로도 일이 아닌 일상으로도 글을 쓴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쓰고, 의무적으로도 쓰고, 습관적으로도 쓴다. 글을 쓰다 보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건 수정이다. 일단 생각나는 대로 100m 달리기 하는 것처럼 내달리듯 쓰지만,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기본! 문맥은 맞는지, 표현은 과하지 않는지, 오해를 살만한 부분은 없는지, 사회 통념에 반하는 내용은 없는지(쉽게 말해 공격당할 포인트는 없는지) 두루 살펴야 한다. 수정하다 보면 왜 이따위로 썼을까 후회가 밀려온다. 글 써서 밥 먹고 산다고 떠벌리고 다닌 내 주둥이를 때리고 싶다. 내게 ‘수정‘은 글쓰기 과정의 가장 큰 장벽이다. 그럼 애초에 잘 쓰면 되지 않냐? 하겠지만 인간이니까! 실수투성이 인간이니까! 수정할 일을 생각하면 숨이 콱 막히고 쓸 엄두가 안 난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쓰기란 불가능하다. 그럼 어차피 해야 할 수정을 위해 이제 나를 어떻게 속여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글쓰기 과정의 ’ 퇴고’ 혹은 ‘수정‘은 일종의 게임이라고 속인다. 오타를 찾아내고, 비문을 찾아낸다. 일정 점수를 적립하면 오늘 저녁, 무알콜 맥주 한 캔이라는 상을 안겨준다. 지루한 수정의 레이스를 무사히 완주한 내가 나에게 주는 포상이다. 오늘도 수없이 많은 ’ 수정 게임‘이 기다리고 있다. 아이 신나. 오늘은 맥주 한 캔으로는 부족할 거 같다. 아무리 먹어도 취하지도 않는 쟁여둔 무알콜 맥주를 넉넉히 꺼내야겠다. 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