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급했던 감정의 문단속
수요일 밤, 늦은 저녁을 먹으며 멍하니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요즘 극장가에서 흥행하고 있는 신작 영화에 출연한 배우가 나온 토크쇼였다. 영화가 잘되니 요즘 행복하냐는 MC의 질문에 배우는 멈칫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배우의 눈은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현장 분위기는 술렁였고, 양옆의 MC는 조심스럽게 답을 주저하는 이유를 물었다.
대중들이 보기엔 그저 잘 생기고, 잘 나가는 배우였던 그에게는 징크스가 있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순간, 행복이 깨졌다.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거나 반려동물을 떠나보냈다. 그래서 행복을 말하면 행복이 사라질 거 같아 좀처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고 했다. 차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러 정리하는 배우에게 국민 MC는 평소의 깐족 톤을 버리고 다정하고 따뜻하게 말했다.
행복할 땐 또 행복하셔도 돼요
그 말에 배우는 어렵게 참던 눈물이 쏟았다. 그 모습을 보다 울컥해 먹던 닭가슴살 덩어리가 목에 탁 걸렸다. 나도 그랬다. 행복한 순간이 와도 그 행복이 깨질지 몰라 행복을 누리지 못했다. 어차피 언젠가 행복은 끝나고,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감정에 시차가 생기면 힘들고 괴로우니까 100을 행복하고 싶어도 50만 행복을 누렸다. 100층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50층에서 떨어지는 게 덜 아플 거라고 나를 다독이면서.
식사를 마친 후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면서도 국민 MC의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현재의 기쁨, 즐거움을 누리기보다 몇 발짝 앞서가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가면 기쁨도 즐거움도 사그라든다. 들떠 설레발치다가 헛헛해지느니 무덤덤하게 넘기는 게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정을 단속하는 게 일이었다. 행복할 때 행복하지 못했고, 기뻤을 때 기뻐하지 못했다. 슬플 때는 덜 슬픈 척하고, 화가 나도 이게 화낼 일인가? 감정 컨트롤을 못 하는 나를 다그쳤다. 그렇게 제때 해소되지 않은 묵은 감정들은 엉뚱한 곳에서 폭발했다. 고스란히 몸에 나타났다. 고장 나고 삐걱거렸다.
그래 행복할 땐 행복하면 되는데 왜 불안해했을까?
행복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행복에 집착한다고 했던가? 언젠가 깨질 행복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쥔 행복을 아낌없이 누려야 한다. 기쁨도, 슬픔도, 설렘도, 고통도 영원한 건 없다. 언젠가 끝이 나게 마련이다. 굳이 먼저 앞서가서 행복이 깨지길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내게 주어진 시간은 똑같을 텐데 행복이 깨질까 봐 불안에 떠는 것보다 행복에 취해 기뻐하는 시간으로 채우는 쪽을 택했다.
성급했던 감정의 문단속 해결법을 찾았다. 이어달리기처럼 이 행복이 지나가면 재빨리 다음 행복이 배턴터치 시키는 거다. 좋아하는 파스타를 만들 때 평소와 달리 마지막에 넣은 버터 한 조각에 풍미가 달라진 파스타 맛에 감동한다. 매번 가기 싫은 마음을 이겨내고 운동을 가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 후 선풍기로 머리를 말리는 순간의 상쾌함을 만끽한다. 크고 작은 행복과 기쁨을 흩뿌려 놓는 일, 별거 아닌 일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일로 행복을 일상에 펼쳐 놓는다. 행복하면 행복해하고, 슬프면 슬퍼하고, 기쁘면 기뻐하는 그런 단순함이 점점 내 삶에 스며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