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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ul 26. 2023

시장에서는 함부로 ‘사주겠다’는 말 금지

홍어 무침이 몰고 온 나비효과

주말 점심 한 끼 정도는 부모님과 밖에서 밥을 먹는다. 어느 토요일, 밥 생각이 없다는 엄마를 집에 남겨두고 아빠와 둘이 집 근처 중국집으로 향했다. 가기 전까지는 늘 먹던 메뉴 말고 새로운 걸 먹어 보겠다 다짐하지만, 결국 똑같은 메뉴를 시킨다. 작은 사이즈의 탕수육과 짜장면 곱빼기를 하나씩 시켜 아빠와 나눠 먹는다. 사실 짬뽕을 먹고 싶었지만, 탕수육도 먹어야 하니 식사 메뉴를 하나씩 시키는 건 무리였다. 배부르게 먹은 후 집으로 가려던 아빠를 이끌어 시장으로 향했다. 이대로 집에 가봐야 둘 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누울 게 뻔하니까 소화시키고 들어가자는 이유였다. 부녀는 나란히 걸어 도보 10분 거리 전통시장으로 향했다. 엄마와 셋이 온 적은 있어도 이렇게 아빠와 둘이 시장에 오는 건 처음이었다. 토요일 오후, 시장은 북적였다.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아빠와 시장 골목을 걸었다.      


시장에 온 목적은 집에 계실 엄마를 위해 찐 옥수수를 살 계획이었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눈앞에 옥수수가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엄마. 요즘 통 기운을 못 차리시니 좋아하는 옥수수라도 사다가 대령해야겠다는 계산이었다. 아빠와 나란히 시장을 걸으며 시장 골목 깊숙이 자리한 찐 옥수수 가게로 향하는 내내 엄마가 된 기분이 들었다. 길게 줄을 늘어선 호떡 가게, 떡집, 반찬가게, 족발집, 붕어빵 노점, 죽집 등등 가게를 지날 때마다 내 입에서 나온 말 때문이었다.


“이거 사줄까? “      


코흘리개 시절부터 다 큰 어른이 된 지금도 엄마 따라 시장에 가면 엄마가 내게 묻던 말이었다. 엄마가 장 보는 동안 지루해하는 딸을 위해 길거리 음식을 파는 가게를 지날 때는 자동응답기처럼 엄마가 했던 말을 이제 내가 아빠에게 하고 있었다. 이미 배가 부를 만큼 식사도 마쳤겠다 딱히 당기는 게 없었는지 아빠는 내 질문에 속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이대로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아쉬운 마음으로 걷다 보니 어느새 오늘의 목적지, 찐 옥수수 가게에 도착했다. 김이 하얗게 오르는 찜통 위에 있던 옥수수 두 봉지를 골라 계산을 하는 중 코로 이상 기운이 감지됐다. 새콤하고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로 옆 가게에서 넘어온 향이었다. 건장한 남성 한 분이 커다란 양푼을 앞에 두고 어깨를 들썩이며 분주하게 새빨간 뭔가를 버무리고 있었다.      

"아빠, 홍어 무침 살까?"     


일 년에 한두 번쯤 아빠가 엄마에게 주문하는 음식이다.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이나 입맛이 없을 때 홍어 무침이나 해 먹자며 엄마를 귀찮게 하던 그 메뉴다. 빨간 홍어 무침을 보는 아빠의 눈이 심상치 않다. 그전까지 뭐든 시큰둥했던 눈빛에 처음으로 반짝하고 생기가 돌았다. ‘그래 저거 사자. 집에 배 있지? 그거 좀 썰어 넣고 오이랑 도라지도 넣으면 맛있지. 채소 사러 가자’ 그냥 순순히 드실 아빠가 아니다. 시판 반찬은 간이 세서 우리 입맛에 맞게 조금씩 부재료를 더 하는 건 흔한 일이다. 아빠가 좋아하는 홍어 무침에는 다양한 채소가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는 채소 종류도 많고, 손질도 번거롭고, 만드는 과정도 손이 많이 가서 한 번씩 만들 때마다 엄마가 몸살을 앓는 메뉴다.      


아빠께 홍어 무침을 권했던 조금 전의 내 입을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어졌고, 홍어 무침 한 봉지가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가까운 채소가게에 들러 도라지, 오이를 샀다. 미나리를 꼭 넣어야 한다는 아빠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오늘 미나리 상태가 좋지 않다고 설득해 겨우 미나리 없는 버전으로 극적 타결을 마쳤다. 손질하기 번거로운 재료 미나리를 사전에 차단한 선방이었다. 만 원어치 홍어 무침을 사고, 만 이천 원어치 채소를 샀다. 간편하게 한 끼 먹으려고 시중에서 파는 반찬을 산 건데 채소를 사는 비용, 다듬는 수고까지 더하면 뭔가 마이너스가 된 기분이다. 찐 옥수수 한 봉지만 사려던 계획은 무너지고 홍어 무침이 몰고 온 나비효과에 계획에도 없던 각종 채소가 내 양손 가득 쥐어졌다. 딸의 선의를 추가 노동 미션으로 돌려준 아빠를 향해 살짝 가자미눈을 쏘았다. 그곳에는 하얗게 센 머리카락에 굽은 등으로 뒷짐을 진 영락없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불같은 성격에 기세 당당하던 아빠는 낡고, 늙었다. 소금기 가득한 울컥함이 치밀었다. 눈 딱 감고 일종의 스스로 불러온 재앙(?)을 수습하고 책임지기로 마음먹었다. 무더위와 무기력으로 잃어버린 아빠의 입맛을 되찾아야 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하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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