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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un 18. 2024

식자재 마트에서 길을 잃을 때

어느 집필 자영업자의 고민

낯선 곳에 여행을 가면 현지 시장과 마트 구경을 명품관 둘러보듯 즐긴다. 똑같은 식재료라도 어느 땅에서 자랐느냐에 따라 맛도, 모양도 미세하게 달랐다. 여행하며 그 차이를 발견하고 음미하는 게 내게는 큰 즐거움이다. 멀리 떠나지 못할 때는 집 근처 식재료 마트에 간다. 전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공수한 재료들이 웅장한 도서관처럼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다. 식재료 마트의 풍경은 일반 마트와 살짝 다르다. 공장에서 나온 공산품이라도 구성, 양, 성분 등 다른 게 많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식자재 마트를 꼼꼼히 둘러보면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밀려온다.      


날이 더워지면서 일주일에 서너 번 이상 비빔국수를 해 먹는다. 매번 양념장을 만들기 번거로워 파우치에 든 업소용 비빔냉면 양념장을 공수했다. 면만 삶으면 라면보다 빠르게 비빔국수가 뚝딱 탄생했다. 신맛을 즐기지 않는 우리 가족 입맛에는 잘 맞았다. (필요하면 취향에 따라 식초를 추가하면 되니까) 비빔국수 몇 번 사 먹을 돈이면 여름 내내 식당에서 사 먹는 맛의 비빔국수를 집에서 먹을 수 있다.      


건강한 집밥을 자주 먹어도 ‘외식‘ 특유의 맛이 당길 때가 있다. 아무리 노력과 정성을 들여도 ’ 외식 맛‘을 따라잡긴 무리다. 멸치 육수 농축액이나 사골 분말이 개구리 눈곱만큼만 들어가도 ’ 돈 주고 사서 먹는 맛‘이 난다. 언젠가 <이자카야는 일종의 거대한 전자레인지와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 있다. 이 얘기를 듣고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이 말속에 깊이 박힌 ’ 뼈‘가 뭔지 절실하게 느끼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식자재 마트에서 파는 업소용 제품 정보가 하나 둘 들어가면서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식당이나 카페에서 음식을 먹으면 어떤 제품과 어떤 소스가 들어갔겠구나 머릿속에서 분석기가 자동으로 돌아간다. 예를 들어 어묵탕이라고 치자. 냉동 어묵을 해동해 뒀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진액을 희석한 육수에 넣고 끓인 후 송송 썬 청양고추와 쑥갓 몇 가닥 올리면 끝. 원가 몇 천 원짜리 공장 제품을 데우고 데코용 부재료만 곁들이면 몇 만 원짜리 음식이 된다. (물론 그 최종 판매 가격 안에는 어마어마한 임대료, 인건비, 각종 공과금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안다.)      


식자재 마트를 둘러보며 알게 된 정보를 통해 식당, 카페, 술집 등의 창업이 왜 이리 많고, 또 폐업률이 높은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됐다. 특별한 기술이 없더라도 눈썰미 좋게 시판 제품을 고르고, 그걸 잘 조합하면 어렵지 않게 음식 맛을 낼 수 있다. 요식업은 진입장벽이 비교적 낮다. 인건비 비싼 연륜 많은 요리사가 없어도 식자재 마트 업소용 제품에 기댈 수 있으니까. 전국 어딜 가든 평타 이상의 음식이 나오는 건 다 식자재 마트 덕분이다. 이 말은 동시에 어디서나 비슷비슷한 맛을 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민도 연구도 없이 전자레인지에서 갓 꺼낸 따끈따끈한 냉동식품 같은 음식을 만날 때는 그래서 슬프다. 특색 없는 음식이 넘치다 보니 만드는 이의 고민과 개성 넘치는 음식을 만날 때 두 배로 기쁘다. 진액 몇 방울이면 낼 수 있는 감칠맛을 만드는 쉬운 방법이 있다. 그런 편한 길을 마다하고 많은 재료와 시간을 들여 직접 육수를 끓여 내는 정성이 담긴 음식을 마주했을 때 감사함에 무릎 꿇고 먹고 싶어 진다. 식자재 마트를 통해 오히려 음식 만드는 사람의 고민과 연구가 가득한 음식을 만나는 기쁨을 더 진하게 느끼게 됐다. 그들만의 세계, 즉 식자재 마트의 문이 사업자가 아닌 일반 소비자들에게도 활짝 열린 순간 진짜들만 살아남는 진정한 승부가 시작된 거다.     


식품회사 석박사 연구원들의 노력과 공장 직원들이 땀이 가득한 업소용 제품으로 도배된 식자재 마트 가운데에서 잠시 멍했다. 나 좀 보라고, 이렇게 멋지고 쉽고 싸고 맛있다고 아우성치는 제품들 사이에서 발이 멈췄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했다. ’ 나의 무기는 뭘까?‘ 갈 길은 먼데 길 잃은 사람처럼 당혹스러웠다. 글쓰기 AI가 날로 발전하는 이 시기에, 누구라도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글쓰기 AI 툴을 이용해 그럴싸한 글을 쓸 수 있다. 굳이 어떻게 썼는지 말하지 않으면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매끈한 글이 탄생한다. 손재주, 말재주, 몸 재주도 없는 내가 가진 기술이라고는 글 쓰는 거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식자재 마트에서 파는 공장제 제품 같은 고만고만한 맛이 나는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현타와 동시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헛헛한 마음을 채우고 싶어 쇼핑 리스트에도 없던 상품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카트에 담았다. 마음만큼 묵직한 장바구니를 든 채 마트 밖으로 나오니 못 보던 핑크색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갓 오픈한 꼬마김밥 전문점이었다. 마트 건너편 상가에 오픈한 배달전문 피자집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폐업한 자리였다. 한동안 조용했던 거리에 미세한 활기가 느껴졌다. 뉴페이스의 등장에 궁금했다. 맛은 있을까? 과연 얼마나 버틸까?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 집필 자영업자‘는 ’ 요식업 자영업자’를 향해 기대와 걱정을 보냈다. 부디 공장에서 찍어낸 업소용 맛 말고, 특색 있는 맛으로 동네 주민들의 입을 사로잡아 오래오래 영업해 줬으면... 이렇게 격하게 응원하고 싶어졌다. 김밥집 사장님은 꼬마김밥을 팔고, 나는 글을 팔지만 우리 모두 ‘팔이 피플’이라는 동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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