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기 전, 짐을 쌀 때만큼이나 신중해지는 일
출퇴근 시간이 긴 편인 경기도민이라 지갑은 깜빡 잊고 나와도 이어폰을 빼놓고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 게다가 직업적 특성상 정적을 못 견디는 성향이라 집에 오면 보지 않아도 TV를 틀어 놔야 하고, TV가 없는 내 방에 들어오면 무조건 음악을 튼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기 전, 짐을 쌀 때만큼이나 신중해지는 일이 있다. 바로 이 여행의 BGM을 만드는 일이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만들어 놓은 음악 리스트를 연속 반복 재생하는 편이다. 어떨 때는 한 곡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떨 때는 앨범 전체가 될 때도 있다.
지난 늦겨울, 군산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타자마자 이어폰에서 흘러나온 것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OST였다. 군산 하면 제일 먼저 떠올랐던 건 이성당의 단팥빵과 채소빵도, 일제 수탈의 역사가 남아 있는 오래된 건물들도, 인증샷 성지인 철길마을도 아니었다. 그저 풋풋했던 다림, 심은하의 수줍은 미소를 짓고 정원, 한석규가 사진을 찍어주던 영화 속 그 장면이었다. 영화 속 배경이 되었던 군산을 가는데 그 앨범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정원이 스쿠터를 타고 지나던 골목, 다림과 정원의 사진이 그대로 걸려 있는 사진관, 우산을 쓰고 나란히 걷던 거리 등등 영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곳을 직접 걸었다. 그때 OST가 흘러나오면 잠시나마 시간을 거슬러 오래된 영화 속으로 직접 들어간 것 같은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비슷한 목적으로 홋카이도 여행을 위해서는 이와이 슌지의 영화 <러브레터> OST를 택했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첫사랑처럼 남아 있는 그 영화. 나 역시 그랬다. 감수성이 벨벳처럼 보드라웠던 대학 새내기 시절, 멀티미디어실에서 본 그 영화 때문에 홋카이도라는 땅에 대해 오래도록 무한한 로망을 품었다. 삿포로에서 급행열차로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운하의 도시 오타루. 기차 안에서 계속해서 <러브레터> OST를 들어서일까? 왠지 역 앞에 덥수룩한 커트머리를 한 ‘여자 이츠키’가 마중 나와 있을 것만 같았다. 곳곳에 눈이 쌓인 거리엔 이츠키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것만 같았고, 유리 공방에선 이츠키 남자 친구가 열심히 작품을 만들고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침 하교시간이라 우르르 몰려 내려온 검은 교복 차림의 고등학생들 사이 ‘남자 이츠키’도 섞여 있을 거 같았다. 이렇게 음악이라는 작은 조미료를 더하면 여행의 맛은 배로 풍성해진다.
시즈오카로 떠나던 날, 공항 리무진에서 우연히 영상 하나를 보게 되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한 멜로망스는 흥에 겨워 그들의 히트곡, <선물>을 부르고 있었다. 멜로망스의 존재를 몰랐던 것도 아니고 그 노래를 처음 들은 것도 아니었다. 회사 후배가 적극 강추하며 멜망 콘서트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통해 그들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고, 그 이후엔 음원차트 상위권에 오른 반가운 그 이름을 보고 재생을 눌러 처음 곡을 듣게 되었다. 말랑한 멜로디와 달콤한 가사가 요즘 젊은 사람들이 참 좋아하겠다 싶었다. 그런데 시즈오카 여행의 시작점에 왜 이 곡에 꽂혔는지 도무지 이성적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공항 가는 길, 무심코 누른 동영상 재생 버튼으로 시작된 그 곡, <선물>은 5박 6일의 시즈오카 여행 내내 플레이되었다. 여행을 떠난다는 들뜬 가슴에 콕 박혀 버린 이 노래는 혼자 여행자의 훌륭한 여행 메이트가 돼 주었다. 그래서 시즈오카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선물>이란 노래고, 이 곡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시즈오카라는 이상한 공식을 만들어냈다. 노래 가사처럼, 나에게만 준비된 선물 같던 여행. 평범했던 일상도 특별해지는 여행. 그게 바로 시즈오카 여행이었다.
스페인 여행의 출발점이었던 마드리드에선 <Hala Madrid y Nada Mas>를 들었다.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의 응원가인 이 곡을 선택한 건 다분히 의도적인 선곡이었다. 내게 스페인은 가우디의 나라도, 하몽의 나라도 아니다. 그저 레알 마드리드가 있는 나라다. 평일 경기임에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스타디움을 꽉 채운 열혈 팬들이 生라이브로 힘차게 부르는 모습을 봤을 때는 소름까지 돋았다. 여행 내내 “할라 마드리드“를 흥얼거리며 마드리드 거리를 걸었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대다수의 이곳 사람들이 레알 마드리드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니 잠시 머무르는 여행자이자 이방인이면서도 이 도시가 낯설지가 않았다. 처음 밟은 땅도 낯설지 않게 만드는 게 여행 BGM의 마력이다.
언젠가 떠나게 될 여행지들에는 미리 배경음악을 선곡해 두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OST, 베네치아에서는 <좋은 사람> 뮤직비디오와 앨범 재킷을 촬영한 토이 4집 <Fermata> 앨범을. 영국 리버풀에 갈 때는 그 고장이 낳은 세계적 스타 비틀즈의 음악 대신 FC 리버풀의 응원가, <You'll never walk alone>. 뉴욕에 간다면 소울 라이츠의 <도시의 밤>, ‘꽃보다 청춘’ 속 그분들의 흔적을 따라 페루 마추픽추에 가게 된다면 이적의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를 들을 것이다. 소중한 선물 보따리를 풀 듯, 애정을 가득 담아 선곡한 여행 BGM을 들으며 오랫동안 바라 왔던 꿈의 그곳들을 걸을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