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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pr 27. 2018

부모님과의 여행이 남긴 변화

성자(聖者)의 길 단기 체험 코스


언젠가 부모님과 40일간 유럽 여행 다녀온 후 어떤 분께서 자신의 이름 앞에 성자(聖者)를 뜻하는 St(세인트)를 스스로 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풉하고 웃음이 터진 적이 있다. 도를 닦아서 온갖 번뇌를 끊고 정리를 깨달은 사람을 뜻하는 성자(聖者). 경험자로써 그 짧은 단어 안에 모든 게 담긴 무수한 것들이 한방에 빡 와 닿았기 때문이다. 단기지만 성자의 길을 단기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부모님과 여행을 떠나 보는 것이다. 가깝다는 이유로 소홀했고, 받는 게 당연했던 관계를 새롭게 뒤집어 보는 기회! 그것이 바로 부모님과의 여행이다. 그래서 그 전과 후, 달라진 많은 것들 중 몇 가지를 꼽아 보았다.  



 한층 넓어진 외식 메뉴 선택의 폭



부모님과 여행이 잦아진 이후 우리 집의 외식 메뉴엔 변화가 생겼다. 여행지에 도착한 순간, 입맛이 흥선대원군 수준인 아빠도 삼시세끼 한식만 고집할 수가 없다. 여행 설계자인 나는 부모님의 입맛을 감안해 여행 내내 메뉴를 선택하고 식당으로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한다. 현지에서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현지식을 찾아 대령하는 일은 꽤나 고난도의 미션이다. 그렇게 도전해 성공한 음식들은 고스란히 한국으로 돌아와 외식 메뉴 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그전까지 “나가서 먹는 밥, 비싸기나 하지 먹을 것도 없고... 그냥 고기나 사다 집에서 구워 먹자”라는 부모님의 말씀대로 집에서 삼겹살을 굽는 것으로 외식을 대체했던 날들도 끝이 난 것이다.     


노을이 아름답게 지던 대만 딴수이 바닷가 공원에서 나란히 앉아 마셨던 대만의 밀크티. 호치민에서 출발해 꼬박 5시간을 달려 도착 한 베트남 무이네에서 먹었던 마늘 볶음밥과 모닝 글로리 볶음. 폴폴 날리는 볶음밥에 양념까지 비벼 먹었던 코타키나발루의 칠리크랩, 끝이 없이 들어가던 마카오의 에그 타르트. 한국에서 온 노년 만두 덕후의 입을 즐겁게 만들어준 홍콩의 각종 딤섬, 한국 소주 생각이 간절하게 만든 일본 후쿠오카의 모츠나베 북경에는 함께 안 갔으면서 각 여행지마다 매번 맛봤던 베이징 덕 등등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일상에 젖어들고 여행의 기억이 흐릿해질 때쯤 여행지에서 먹었던 이국의 맛을 찾아 외식을 감행한다.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주문을 하고 맛을 본다. 현지의 음식 맛과 비교를 하기도 하고, 그때의 웃음 나는 기억들을 꺼내다 보면 식탁 위는 그 어느 때 보다 화기애애해진다. 반찬 많이 나오는 한식집도 좋지만 때로는 색다른 맛을 느끼고 싶을 때, 여행지의 음식들은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준다.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이야깃거리
    


현지의 음식이 공감대를 만들어 주는 것처럼, 여행지에서 함께 보낸 시간들은 고스란히 이야깃거리가 된다. 사실, 부모님도 자식들도 일과를 마치고 지쳐 집에 들어오면 겨우 인사만 한 채 각자의 공간으로 파고든다. 같은 집안에 있지만 식사 때를 제외하고 얼굴을 마주 보며 다정하게 얘기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각자 먹고살기에 바빠 “진솔한 대화“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대화 단절은 고스란히 불통의 그늘을 만들어냈다.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쉰다는 것조차 부담스럽게 느낄 지경이었다.     


처음 부모님과의 여행을 결심했을 때 무엇보다 걱정이었던 것은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24시간 내내 부모님과 붙어 있어야 하는 점이었다. 자금이 넉넉했다면야 두 분만 오붓하게 지내도록 방을 잡았어야 했지만 통장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장성한 딸은 두 분의 방에 엑스트라 베드를 추가하는 민폐 아닌 민폐를 끼쳤다.     


여행 첫날부터 대차게 아빠와 한바탕 하고 “이 몸서리치게 무거운 공기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한 순간도 있다. 하지만 24시간 내내 수갑을 차고 한 몸으로 움직이는 예능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찍는 것처럼, 꼼짝없이 붙어 있어야 했다. 덕분에 앙금이 쌓이기도 전에 풀어졌고, 그 이후의 여행은 한 결 편해져다. (나중에 사정이 돼서 방 두 개를 잡았는데도 그간 각각 안방과 거실에서 잠을 주무셨던 부모님은 두 분만의 시간과 공간을 마다하셨다. 이것이 바로 결혼 43년 차의 위엄!)    


앞서 썼던 대로 베트남 메콩강 투어를 갔다가 엄마를 잃어버렸던 일이나 대만에서 모녀가 닫히는 지하철 문에 간신히 세이브하라 뒤쳐진 아빠를 놓고 온 일 등등 당시에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지금은 웃음이 나는 에피소드도 만들었다. 신기하게도 늘 여행 중에는 무지개를 만나는 일, 중간 성적표를 확인하듯 “지금까지 먹었던(보았던)것들 중 1등은 뭐야?”라는 나의 단골 질문에 답하는 일 등등 잊을 수 없는 그때 그 순간들을 이야기하면서 부모님과의 마음의 거리가 좁혀졌다. 낯간지러운 애정표현이나 오글거리는 말 대신 무심하고 건조한 분위기가 익숙한 우리 가족은 여행을 통해 조금 가까워졌고, 많이 편해졌다.     

 가족의 재

 미처 알지 못했던 가족의 재발견



여행 기간 동안 24시간 내리 같이 붙어 있다 보면,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부모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잡곡밥에 나물만 좋아하는 줄 알았던 억척스러운 엄마도 때론 화려한 디저트를 곁들인 호사스러운 티타임을 즐길 줄 아는 천생 여자였다. 매사 시니컬한 귀차니스트 아빠도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는 풍경 앞에선 먼저 포즈를 취하고 기념사진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인증샷 장인이시다. 취두부나 고수 등 향이 강한 현지 음식에도 과감하게 도전하길 좋아하는 엄마. 베트남 달랏 산속에서 레일 롤러코스터를 타고 아이처럼 신나 하던 아빠. 여행지에서 본 부모님의 새로운 모습이 낯설기도 하지만, 사실 부모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당신들 본래의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즐겁고 신나 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짠한 마음이 울컥 솟아오를 때가 있다. 이렇게 여행을 좋아하시는 걸 왜 이제야 함께 왔을까?? 지난 1월 보름간의 긴 여행 중 엄마 아빠는 몇 번이고 말하셨다. “아마 이게 마지막 해외여행이 되지 않을까? “ 체력도 기력도 예전 같지 않고 점점 쇠약해져 가는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인 걸 나도 안다. 하지만 나는 “무슨 소리냐”라고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금세 싸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나는 또 일개미처럼 돈을 벌 테니 두 분은 평소에 다리 운동도 많이 하고 체력 관리 잘하시면 또 올 수 있다고 급히 두 분을 다독였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여행 후에는 꼭 포토북을 만든다. 나 스스로도 여행을 제대로 정리하는 과정이고, 사진 속에 알알히 박혀 있는 부모님이 기뻐하는 표정을 다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앨범에 끼워 넣거나 인화하는 것보다 한 번에 정리할 수 있어서 시간과 돈은 좀 더 들지만 부모님의 만족도는 크다. 여행을 다녀오고 포토북까지 완성해야 진정한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포토북 맨 뒤에는 인장을 찍듯 늘 똑같은 멘트를 써넣는다. <다음엔 또 어디를 가지?> 이 여행이 끝이 아니라 다음을 기다리고 기대하기 하는 마법의 멘트다. 매번 갈 때마다 부모님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것도 그들과 함께 하는 여행의 재미 중 하나다. 그래서 부모님과의 여행은 부모님만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큰 설렘이다. 그래서 또 차근차근 준비한다. 부모님과 함께 떠날 여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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