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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y 11. 2018

시즈오카에서 만난 500엔의 행복

슈젠지 온천마을의 사쿠다(さくだ) 소바




시즈오카에 갈 때, 위시 리스트 중 하나는 바로 후지산을 보면서 노천온천을 하는 것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이었다면 목 좋은 곳에 료칸에 묵었겠지만 가난한 혼자 여행자에게 여러모로 부담이었다. 결국 료칸은 포기하고 당일치기 온천장을 가기로 했다.     


처음에는 가와구치코(河口湖) 호수에 비친 후지산을 보려 그곳에 간 김에 괜찮은 당일 치기 온천을 할 예정이었다. 호수 외곽의 작은 마을을 찾아갔지만 성수기가 아니어선지 아쉽게도 휴장 중이었다. 쓸쓸한 발걸음을 돌려 숙소로 향해야만 했다.     


다음날 내가 대안으로 찾은 곳은 슈젠지 온천 마을이다. 후지산은 안 보이지만 일본 온천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9세기부터 내려온 자그마한 사찰 슈젠지의 내부에 온천수가 솟아올라 그 일대를 슈젠지 온천 마을이라고 부른다. <나 혼자 산다>에서 배우 이시언이 시즈오카 여행 중 1박을 했던 곳으로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곳이다.     



시즈오카 역에서 JR을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슈젠지 역에 내렸다. 평일 낮이어서인지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여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7 정거장쯤 가야 마을에 도착한다. 내가 탄 버스에는 관광객보다는 현지인들이 많았다. 좁은 시골길을 곡예하듯 달린 버스는 손님들을 슈젠지 마을 버스정류장에 내려 주었다. 온천을 하기 전, 마을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온천으로 먹고사는 마을답게 개천을 따라 죽 료칸들이 늘어서 있다. 무료 족욕탕엔 관광객 몇몇이 발을 담그고 있다. 하지만 난 온천을 할 몸이므로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대나무들이 가득한 작은 산책로가 보인다. 가운데는 동그란 평상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이 간간이 지나가긴 하지만 별 신경 쓰지 않고 그곳에 등을 대고 누웠다. 작은 바람에도 대나무는 솨~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복잡했던 머릿속 잡념들을 청소기로 쫙 빨아들이는 기분이다. 하늘은 눈부시게 파랗고, 바람은 기분 좋게 불었다.     


대나무 산책로를 빠져나오는데 낯익은 움막 하나 보인다. 그렇다. 배우 이시언이 먹었던 소바집이다. 사쿠다 (さくだ) 소바. 움막 밖에는 (누군지 알 순 없지만) 유명사들의 사인과 사진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다. 게다가 비어있긴 하지만 대기석까지 있는 걸 보면 꽤 인기가 많은 곳이었나 보다.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은 상태라 갈까 말까 고민을 했다. 하지만 한적한 이때가 아니면 못 먹을 거 같아 배꼼 하고 문을 열었다. 다 합해도 채 10명이 못 앉을 작은 움막 내부. 안에는 일본인 한 팀, 중국 혹은 대만팀 한 팀. 이렇게 네 명이 앉아 있다. 점심때를 지난 터라 조용했다.      


내가 어색하게 입장하니 셰프는 환하게 웃어준다. 일본말로 안내를 했지만 내가 못 알아들으니 간단한 영어로 “차이니즈? 코리안?”하고 묻는다. “칸코쿠진데스~”하고 자리에 앉았다. 오마카세 스타일인 것을 알고 왔기에 다찌 너머로 셰프의 빠른 움직임을 구경하며 기다렸다.     


앞선 손님들의 메뉴가 한창 만들어지고 있었다. 자그마한 주방을 최적화해 사용하는 셰프의 잰 몸놀림에서 그간 얼마나 많은 소바를 만들어 왔는지 상상해 봤다. 물이 펄펄 끓는 솥에 미리 반죽해둔 메밀면을 기계에 넣어 즉석에서 뽑아 준다. 면이 익으면 찬물에 재빨리 헹궈 대나무 발이 얹힌 접시 위에 올린다. 그리고 갈아둔 와사비와 소금을 톡톡 쳐 내어 준다.     



메밀면, 와사비, 소금뿐인 단출한 메뉴. 사실 재료만 보면 각각 다 상상이 가는 맛이다. 이게 맛있어봤자 얼마나 맛있겠냐 얕잡아 보며 시식을 시작했다. 먼저 면만 호로록 맛봤다. 어? 다음엔 소금이 뿌려진 곳을 먹어 봤다. 어?? 마지막으로 와사비까지 섞어 맛을 봤다. 어??????????????????????????    


메밀면, 와사비, 소금. 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맛이다. 하지만 셋의 조화는 놀라웠다. 심심한 메밀면에서는 메밀 특유의 구수한 향이 올라왔고, 시판 제품이 아니라 거친 면의 식감이 입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여기에 소금이 더해지면 아련한 단맛을 낸다. 마지막으로 와사비는 메밀면이 가질 수 있는 곡물 특유의 잡내를 잡아 주었다. 또한 와사비의 알싸한 매운맛은 심심할 수 있는 메밀면과 어우러져 당돌한 매력을 뽐낸다. 마치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순수한 여고생이 메이크업 파워로 절세 미녀로 변신한 것 같다.      



다음 코스는 쯔유와 고구마튀김이 얹어진 텐푸라 소바다. 쯔유는 직접 만드셨는지 상표도 없는 생수 페트병에 담겨 있었다. 자작한 국물에 소바를 적셔 맛을 봤다. 감칠맛이 입안에 몰아친다. 바로 튀겨낸 바삭한 고구마튀김과 함께 하니 짠단의 매력을 폭발시킨다.     


거의 다 먹어 갈 때쯤, 셰프는 그릇을 달라고 한다. 그리곤 뜨거운 면수를 붓고, 작은 튀김가루 즉 텐카츠를 뿌리고 작은 유자껍질 조각을 넣어준다. 뭔 맛이냐 싶겠지만, 이것이야 말로 오마카세 소바의 화룡점정이다. 구수한 면수와 쯔유가 어우러져 속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게다가 작은 유자 껍질 조각이 내뿜는 향은 입을 깔끔하게 정리해 준다.     


국물 한 방울 없이 바닥까지 싹싹 비운 내 모습을 보곤, 셰프는 흐뭇하게 웃었다. 내가 소바 코스를 다 먹어 갈 때쯤 손님들이 또 들이닥치고 있었다. 자리가 좁으니 어서 일어나는 게 이 맛있는 소바를 선사해준 셰프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움막을 나오면서 셰프에게 500엔짜리 동전 하나를 건넸다. 동전 하나를 건네는 손이 민망하게 느껴졌다. 단돈 500엔에 이렇게 알찬 코스 요릴 맛봤다는 게 손님 입장에서는 행운이었지만, 셰프에게는 미안했다.    


아마 성인 남성이 먹기에는 분명 부족할 양이다. 슈젠지에 갔는데 식사 말고, 든든한 간식을 원한다면 한 번쯤 들러볼 가치가 있는 곳이다. 세련됨보다는 투박함, 화려함 보다는 소박한 일본의 맛을 느끼고 싶다면 고민하지 말고 꼭 들르길 추천한다.     


언젠가 머지않은 시간, 다시 슈젠지에 갈 때까지 꼭 그 자리에 있어주길 바라는 응원의 마음을 가득 담아 셰프께 인사를 다음 목적지인 온천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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