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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변잡기

냉침하듯 살아간다

서두르지 않고, 은은하게 스며드는 시간

by 호사


호박차, 감잎차, 잭살차, 녹차, 호지차가 들어 있는 선물 세트를 받았다. 녹차를 빼면 대부분 처음이라 티백을 하나씩 뜯어 맛봤다. 오래 커피에 길든 입에는 조금 심심했다. 그래도 그 나름의 단아하고 정갈한 맛이 있었다. 새로운 것들 앞에 서면 늘 겁부터 난다. 그런데 막상 시도해 보면 의외로 맞는 구석이 있다. 차가 마음에 들어서 더 사볼까 하고 브랜드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여름엔 냉칩법으로 즐겨보세요!”


냉침 아니고… 냉칩? 내가 모르는 찻잎 우림 방식이 또 있나 싶어 클릭했다. 본문에는 ‘냉침’이 제대로 적혀 있었다. 이전 페이지의 ‘냉칩’은 그냥 오타였다. 올린 지 1년이 넘은 페이지인데 담당자는 알까.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걸까. 일면식도 없는 그 사람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남의 글 오타는 기막히게 잡아내면서 내 글 속 오타 앞에서는 눈이 침침한 걸까? 엉뚱한 데서만 유능한 내 눈이 밉다. 다음에 차를 받으면 꼭 냉침으로 마셔봐야겠다. ‘냉침’이 ‘냉칩’으로 바뀐 덕에 냉침차에 대한 기대가 쑥 자랐다.


며칠 뒤, 도착한 택배 상자를 열고 감잎차부터 꺼냈다. 티백 몇개를 묶어 찬물로 채운 1.6리터 스테인리스 물병에 넣었다. 그걸 냉장고 도어 포켓에 넣고 하룻밤을 기다렸다. 다음 날이면 은은하게 우러난 시원한 감잎차가 완성됐다. 냉침은 저온에서 오래 우려 떫은맛과 잡미가 적다. 맛도 부드럽다. 비타민 C처럼 열에 약한 성분을 지키는 데도 좋다고 한다.


날이 추울 땐 비염에 좋다는 작두콩 차를 종종 끓여 마신다. 하지만 요즘처럼 사람이 아니라 망고가 살기 좋은 무더운 날씨에 뭘 끓이는 건 집을 찜질방으로 만드는 일이니 피해야 한다. 그래서 냉침만이 살길이다. 하룻밤을 거쳐 완성된 감잎차에는 싱그러운 풀 향과 은은한 단맛이 어우러져 있다. 한 모금 넘길 때마다 입안이 편안해지고 복잡했던 머릿속도 가라앉는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냉침하듯 살아야지

끓는 물에 잎을 넣으면 금세 색과 향이 우러난다. 하지만 뜨거운 만큼 빨리 사라진다. 삶도 그렇다. 빨리 결과를 뽑아내려고 하면 그 순간은 진하게 느껴져도 금세 식어버린다. 차라리 찬물에 담가 두듯 천천히 기다리는 편이 오래 남는다. 냉침은 잎 속 깊숙이 있던 성분이 조금씩 우러나는 과정이다. 밖은 차가워도, 차 안에서는 본연의 맛과 향을 지키며 천천히 변하고 있다.


사람 관계나 내 마음도 그렇다. 확답을 재촉하지 않고 변화를 강요하지 않고 함께 시간을 버티다 보면 어느 날 은은한 맛이 스며든다. 마음이 끓어오를 때도 숨이 턱 막히는 날에도 굳이 불을 올리지 말고 찬물에 담가 두자. 시간이 걸려도 괜찮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이미 변하고 있다. 그 변화는 서두름이 빼앗아 갈 수 없는 향이 될 테니까.


지난밤 냉장고 한 칸에 채워두었던 냉침 감잎차를 다음 날 아침 꺼냈다. 그리고 좋아하는 찻잔에 가득 따랐다. 투명한 황금빛 감잎차를 마시며 ‘냉침의 법칙’을 다시 가슴속에 되새긴다.


1. 끓이지 말 것

2. 흔들지 말 것

3. 그리고 서두르지 말 것.


살다 보면, 차도 마음도 급하게 달이면 떫어진다. 은은하게, 오래 우려낼 때 비로소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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