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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변잡기

서점에서 하는 은밀한 취미

누구도 시키지 않은 책정리를 하는 이유

by 호사


서점에 가면 괜히 바빠진다. 손님들이 책을 읽다 아무 데나 내려놓은 책, 띠지가 빠져나와 늘어진 채 매달려 있는 책, 비뚤비뚤하게 몸을 기댄 책들을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책 한 권은 누군가의 몇 년이 걸린 결실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사투 끝에 겨우 세상에 내놓은 유일한 증거물일 수도 있다. 그런 걸 알기에 모른 척 지나치지 못한다. 매대에 놓인 책은 많고, 그에 비해 직원들의 손길은 늘 부족하다. 그러니 조금 흐트러진 책 정도는 내 손으로 슬쩍 단정하게 정리해 놓는다.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놓이기까지 상상보다 훨씬 길고 복잡한 여정을 거친다. 작가가 원고를 탈고하면, 편집자와 주고받으며 수차례 교정을 본다. 문장 하나, 쉼표 하나, 심지어 띄어쓰기 하나 때문에 머리가 터질 만큼 고민한다. 표지 디자이너는 색감 한 톤을 두고 몇 날 며칠 밤낮을 고심한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사소한 집착과 결핍, 애정이 쌓여 마침내 책이 인쇄소의 기계로 들어간다. 잉크 냄새와 기계 압력의 무게를 견뎌내면 차가운 종이가 ‘책’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후 물류창고를 거쳐 트럭에 실리고, 먼 길을 달려 전국 서점 매대 위에 놓인다. 그 모든 과정을 버텨낸 끝에 드디어 독자를 기다리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 그러니 서점에서 대충 흩어져 있는 책을 보면, 왠지 “고생 많았다”라는 말을 대신 전해주고 싶어진다. 말을 한다 해도 책은 들을 귀가 없으니 대신 ‘행동’으로 표현한다.


서점에서 내 손은 언제나 자동으로 움직인다. 무더위에 지친 강아지의 혀처럼 길쭉 삐져나온 띠지를 다시 정성스레 접어 책날개 안쪽에 끼워 넣는다. 사춘기 학생의 삐딱한 고개처럼 기울여 놓인 책은 반듯하게 세워둔다. 내가 쓴 책도 아니고, 아는 출판사의 책도 아니다. 그럼에도 담당자가 처음 서점 매대에 올려놨을 때처럼 최대한 단정히 매무새를 고쳐 놓는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작은 의식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책을 집어 들게 될 ‘미래의 독자’를 떠올린다. 책이 반듯하게 정리된 덕분에 조금은 더 기분 좋게 책을 만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책은 단순한 종이 묶음이 아니다. 책 한 권에는 누군가의 삶, 누군가의 간절함, 누군가가 뜬눈으로 하얗게 지새운 밤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책을 고른다는 건 결국 누군가의 삶을 만나는 일이다. 어떤 책은 지쳐 있던 나를 다독이고, 어떤 책은 가보지 못한 세계를 활짝 열어주며, 또 다른 책은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런 소중한 만남을 최대한 좋은 상태에서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이다.


세상에 허투루 만들어진 책은 없다. 그러니 허투루 놓여서도 안 된다. 책을 존중하는 마음은 곧 책을 만든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이 되고, 책을 집어 들 독자를 존중하는 마음이 된다. 그래서 나는 서점에 가면 바빠진다. 책을 한 권이라도 더 가지런히 세우고 띠지를 곱게 끼워 넣는다. 아무도 시킨 적 없는 일이지만, 이 은밀한 취미는 작은 ‘연대’의 표현이다. 책을 만드는 사람, 책을 파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그 모든 이들이 느슨하게나마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 끝에 결국 마음속에서 주문이 흘러나온다.


“부디 좋은 독자에게 가닿기를.

허투루 놓이지 않고, 허투루 읽히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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