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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변잡기

결국, 다 고슴도치가 된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고슴도치메이커

by 호사


제주 붐이 한창이던 시절,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치면 어김없이 제주로 떠났다. 몸과 마음이 텅 비어버린 듯했지만 바다를 바라보면 다시 채워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막힌 곳 없이 뻥 뚫린 하늘과 바다, 마음의 묵은 때를 벗겨 줄 거 같은 거센 바닷바람과 파도, 검은 돌담과 은은한 귤 향기. 몸과 마음이 탈탈 털린 나를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해 줄 것 같았다.


대문자 J는 검색 신공 끝에 지금 이 기분, 이 상태를 위한 최적의 숙소를 찾아냈다. 동쪽 세화 바닷가 근처, 갓 지은 듯한 신상 건물. 깔끔하고 조용한 분위기에다 사진만 봐도 제주의 싱그러운 공기가 느껴졌다. 기대가 가득 차올랐다.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원하는 건 결국 비슷하지 않을까? 자발적 고립, 방해받지 않는 자유, 끝없는 고요 같은 것들 말이다. 이 숙소라면 그 조건을 다 품고 있을 것 같았다.


공항에 내려 일주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린 뒤 세화에서 내렸다. 작은 캐리어를 달달 끌며 좁은 돌담길을 따라 걸었다. 도롯가에서 10여 분 걸어가자, “새 건물 냄새”가 나는 두 채의 건물이 나타났다. 똑같은 모양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고, 한 채는 주인이 살고 다른 한 채는 손님을 위한 공간이었다.


사전에 보내준 안내 문자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 안에 적힌 대로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굳게 닫힌 나무문이 열리더니, 주인이 나타났다. 그는 말수가 적었고, 피곤해 보였다. 방 위치를 알려주고 숙소 비밀번호와 안내문이 적힌 코팅 종이를 건넸다. 눈을 마주치긴 했지만,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낯을 가리거나, 혹은 이미 수없이 반복된 절차가 그를 무감각하게 만든 듯했다.


방에 들어가며 안내문을 훑어보는데, 이곳은 조금 달랐다. 분리수거, 매너 타임, 조식 시간은 기본이고, 집기와 침구 파손 시 청구 금액, 이용 시 디테일한 주의사항까지. 안내문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숙소 구석구석에 붙어 있었다. 따뜻한 감성과 간결한 인테리어와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문구들도 섞여 있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진상들이 다녀갔길래…’


나는 그 순간, 자영업자의 고단한 하루들이 안내문의 활자로 변해 눈앞에 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벽에 붙은 안내문은 사실 숙소의 이용 규칙이 아니라, 주인의 살아 있는 상처 기록 같았다. 애정을 담아 꾸민 공간에 하나둘 상처가 날 때마다 주인장의 마음에도 생채기가 났을까?


다음 날 아침, 조식을 먹으러 공용 주방으로 향했다. 바삭한 토스트와 달걀 프라이, 버터와 잼, 따끈한 드립 커피, 노란 귤 한 알이 접시에 담겨 있었다. 소박하지만 정성이 느껴지는 한 끼였다. 전날보다 조금 부드러워진 얼굴로 주인이 물었다.


“편안하게 주무셨어요? 오늘은 어디 가실 계획이세요?”


숙소 주인장과 손님의 흔하디 흔한 주제로 짧은 대화를 이어가던 끝에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곳곳에 안내문이 참 많더라고요. 많은 일이 있었나 봐요?”


주인은 잠시 멈칫하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자영업은 처음이에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예약이 막 반갑지만은 않아요.

랜덤 뽑기처럼 어떤 사람이 올지 모르니까요. 솔직히 사람 상대하는 게 더 어려워요. 막연히 예상은 했지만 현실 세상에는 상상 이상인 사람이 정말 많거든요.”


목소리는 지쳐 있었지만 단단함이 느껴졌다. 어느새 그는 단순한 숙소 주인이 아니라, 수많은 상처 끝에 바늘을 세운 ‘인간 고슴도치’로 보였다. 나는 그 주인이 한 자 한 자 썼을 안내문에서 보았다. 진상 손님들에게 찔리고 긁히며, 결국 가시를 키워낸 과정을. 안내문은 단순한 숙소 규칙이 아니었다. 그가 공간은 물론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막이었다.


그날 이후 예민하거나 까칠한 사람을 만날 때면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 또 다른 인간 고슴도치구나.’ 사람은 상처가 깊어질수록 마음은 벽을 세우고, 말은 점점 날카로워진다. 누군가에겐 그게 안내문일 수도, 불친절한 표정일 수도 있고 까칠한 말일 수도 있다. 그것들 그 속엔 사실, 더 다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숨어 있다.


결국 사람은 사람 때문에 뾰족해지고 또 단단해진다. 그 주인은 안내문으로 자신을 지켰고, 나는 그를 통해 알았다. 누군가의 가시를 볼 때 조금 더 천천히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걸. 그 바늘 끝에는 사실, 지키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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