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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변잡기

불만을 솔직히 말하는 용기

큰 불화를 막는 작은 불평

by 호사



출처 : tvN 유퀴즈


그 말을 듣는 순간, 바쁘게 움직이던 포크가 허공에서 멈췄다. 공복 18시간을 견딘 후 난생처음 만들어 본 투움바 파스타를 반도 먹지 못했는데 그 한 문장이 두 뺨을 세차게 후려갈기는 듯했다. "정신 차려!"라고 외쳤다.


밥 친구 삼아 틀어놓은 TV 토크쇼의 주인공은 한국 여성 최초로 무동력 요트 세계 일주에 성공한 사람이었다. 싱가포르에서 보험 계리사로 일하다가 11개월간 바람과 돛만으로 지구 두 바퀴에 가까운 거리를 일주하는 험난한 레이스에 도전했다. 영국 포츠머스항을 출발해 330일 동안 세계 바다를 돌고 돌아 다시 복귀하는 여정이었다.


참가자들의 면면도 흥미로웠다. 국적도, 직업도, 나이도 제각각. 작은 배에 몸을 싣고, 오로지 협력과 인내로 버텨야 했다. 당연히 갈등이 잦았다. 자동차 회사 CEO인 오스트리아인 할아버지는 "참치 통조림이 먹고 싶다"며 울었고, 또 다른 할머니는 "시리얼을 왜 이렇게 조금 샀냐"며 따졌다. 이런 불만은 식량 담당이던 주인공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여기까지라면 흔한 뒷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놀라운 건, 그 불평 많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했다는 사실이다. 평균 40%에 달하는 높은 탈락률을 감안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MC가 그 비결을 묻자, 주인공은 단호하게 말했다.


"불만을 표출하시는 분들이 오래가시나 봐요."


그 말을 들으며 조용히 곱씹었다. 나는 불만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음식에서 머리카락이 나와도 그냥 건져 먹고, 서비스가 기대에 못 미치면 따지기보다는 아무 말 없이 그 매장을 다시 가지 않는다. 괜히 불편한 공기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차라리 내가 삼키는 편을 택한다. 문제는 이런 태도가 단순히 외식 자리에서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터에서도, 가족 사이에서도, 친구 관계에서도 나는 쉽게 불만을 삼킨다.


‘혹시 내가 오해한 건 아닐까?’

‘불만을 드러내면 괜히 감정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상대방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끝없이 머릿속에서 물음표를 굴리다가, 결국 조용히 물러선다. 하지만 그 요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330일 동안 광활한 바다를 건너는 항해는 마치 인생의 축소판과 같다. 한정된 공간, 언제든 폭풍우가 몰아칠 수 있는 상황에서 작은 불만 하나가 쌓여 앙금이 되고, 앙금이 커지면 배를 흔드는 거대한 파도가 된다. 그때 필요한 건 불만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불만을 제때 꺼내놓는 것이다.


“이건 불편하다.”

“나는 이런 게 힘들다.”


이 말들은 단순한 투정이 아니라, 끝까지 항해를 이어가기 위한 ‘안전 밧줄’이다. 참다 보면 결국 한 번에 폭발하고, 그때 상대는 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동안 아무 말 없더니 왜 이제 와서?”라는 오해까지 얹힌다. 관계가 흔들리는 건 바로 그 순간이다.


우리의 삶도 좁은 갑판 위에서 망망대해를 건너는 항해와 다르지 않다. 결국 함께 완주하려면 침묵이 아니라 대화가 필요하다. 현명한 삶은 불만이 없는 삶이 아니라, 불만을 제대로 다루는 삶이다. 불만을 솔직히 표현하는 건 ‘나를 위한 일’이자 ‘상대를 존중하는 방식’이다. 감정을 투명하게 드러낼 때 오해는 줄어들고, 갈등은 부드럽게 풀리며, 관계는 오히려 단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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