꽈배기 인간은 되고 싶지 않아서

등산화 끈을 묶으며 생각한 것들

by 호사

왜 나는 신발 끈 하나 제대로 못 묶는 인간일까? 등산하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 생각은 너덜 바위를 지나, 정상을 찍고, 다시 후들거리는 다리로 하산할 때까지 머리에 둥둥 떠다녔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부정기적으로 다니던 ‘억지 등산’이 아니라 내 의지로 자발적 등산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처음 제대로 된 등산화를 샀다. 기대에 차 발목이 흔들리지 않도록 등산화 끈을 꽉 묶고 출발했다.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풀린 끈 때문에 설레던 걸음이 멈춰 짜증이 났다. 가뜩이나 어설픈데 등산화 끈조차 초보인 나를 놀리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다시 묶고 풀리고 다시 묶기를 반복한 끝에 등산을 마쳤다. 신발 끈까지 말썽을 부려서인지 평소보다 더 녹초가 됐다. 내려오자마자 인터넷 포털 검색창에서 해결책부터 찾았다.


등산화 끈 안 풀리게 묶는 법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평소 묶는 나비매듭을 마지막에 고리를 한 번 더 돌려 묶는 방법을 시도했다. 이중 잠금의 견고함 때문이었을까? 일부러 끈을 잡고 당겨 풀지 않는 한 다시 풀리지 않았다. 별다른 변화는 없고 그저 한 번 더 꼬았을 뿐인데 풀리지 않다니 ‘꼬임’의 힘에 감탄했다.


등산할 때는 자꾸 풀리는 끈이 문제였는데, 어떤 끈은 너무 단단해서 문제일 때도 있다. 다시 등산화 끈을 동여매는 내내 한 사람이 떠올랐다. 절대 풀리지 않는 등산화 끈을 닮은 그 사람.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이 생길 때가 있다. 하지만 공교롭게 그 사람은 매번 운이 없었다. 세상 모든 게 억지로 까내리기 하고, 주변에 이상한 사람만 꼬였다. 늘 손해를 봤고, 피해자가 됐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어떻게 그런 일을 자주 겪는 걸까?’ 안타까웠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이상하게 불편했다. 남 얘기 같지 않아서.

남의 눈의 티끌은 잘 보면서 내 눈의 대들보는 못 보는 게 인간이라서일까? 그제야 내 문제를 파악했다. 모든 일을 그렇게 꽈배기처럼 꼬아서 해석하면 끝이 없었다. 반복의 이유는 단순했다. 벌어진 일을 직시하지 못하는 버릇 때문이었다.

상대방이 베푼 친절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떤 의도가 있는 친절이 아닐지 의심했다. 명백히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생긴 일이 맞는데도 운 탓을 하며 억울해했다. 스스로 친 벽에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고, 몇 없던 곁의 사람들조차 그 두 번 꼬고야 마는 습관에 지쳐 조용히 멀어졌다. 자신을 외롭게 만든 건 상황을 꼬아서 보는 버릇이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꼬아서 생각하는 습관은 쉽게 풀릴 리가 없었다.


자꾸 풀리는 등산화 끈을 보면서 ‘나는 신발 끈 하나 제대로 못 묶는 인간일까?’ 자책하고, 등산화 끈조차 초보인 자신을 놀린다고 느꼈던 사람이 바로 나다. 등산을 통해 ‘못난 자신과의 거리 두기’를 했고 ‘성취감 충전’을 반복했다. 산을 오가며 일면식 없는 사람들의 대가 없는 친절을 주고받았다. 세상에는 의도와 꿍꿍이보다는 순수한 친절과 도움을 건네는 사람이 더 많았다. 숨 쉬듯 의심하고 비관적으로 보던 산 아래 세상과는 딴판이었다.


산을 오르내리며 정상에 발 도장을 찍는 게 아니라 발로 못난 나를 다시 빚은 기분이었다. 모난 부분은 깎아내고, 울퉁불퉁한 부분은 부드럽게 다듬고, 부족한 부분은 채운다. 이제 등산화 끈이 풀려서 멈춰 서는 일은 없다. 끈을 두 번 꼬아 단단히 묶는 방법은 손에 익혔다. 반면 생각이 꼬이려는 신호가 감지되면 재빨리 생각을 멈춘다. 그리고 ‘너 또 꽈배기 모드 작동이야?’라고 나에게 되묻는다. 그럼, 생각의 열기가 조금 식는다. 필요 이상으로 꼬지 않고도 상황을 바라볼 여유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