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의 가성비

쓰레기 빌런과 감자수프의 상관관계

by 호사


빌런을 언제 어떻게 만날지 모른다는 스릴은 인생을 쫄깃하게 만든다. 특별할 거 없는 날이었다. 그날도 달리기 위해 집을 나섰고, 본격 달리기 전 중랑천 근처 공원에서 루틴대로 몸을 풀었다. 몸은 스트레칭하고 있지만 늘 그랬듯 시선은 공원 여기저기를 탐색한다. 그러다 눈에 띈 할아버지. 반짝거리는 개모차를 밀면서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 앞에는 하얀 포메라니안이 코를 킁킁거리며 열심히 구경 중이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여 슬쩍슬쩍 눈길을 줬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바쁘게 돌아다니던 강아지는 마음을 정했는지 중랑천으로 향하는 경사로 근처 철 구조물에 볼일을 봤다. 그걸 흐뭇하게 지켜보던 할아버지는 익숙하다는 듯 개모차에서 휴지를 꺼내 강아지 엉덩이를 닦았다. 뒤처리도 깔끔하게 하시는구나 하고 시선을 거두려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펼쳐졌다.


할아버지는 뒤처리한 휴지를 곱게 접더니 둑 아래로 휙 던졌다. 익숙한 일인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당황해 고개를 쑥 빼서 보니 던진 휴지는 산책로와 둑 중간 콘크리트 구조물에 떨어졌다. 순식간이라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아무 일 없다는 듯 떠나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매일 아침 중랑천에는 공공 일자리 사업 참여하는 노란쪼끼 부대가 등장한다. 검정 비닐봉지와 집게를 들고 쓰레기를 줍는다. 만날 뭐 그렇게 주울 게 있나 싶었다. 날마다 저렇게 줍는데 쓰레기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저런 쓰레기 빌런 때문에 그분들이 부지런히 줍는 거였다. 드디어 미스터리가 풀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쓰레기 빌런 때문에 길이 지저분해지고, 세금이 낭비되고, 동식물들도 살기 힘들어진다. 빌런들을 향한 미움이 올라오자 기분이 금세 망가졌다. 찝찝한 기분을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1km 정도는 할아버지의 행동이 머릿속에서 리플레이 됐다. 쓰레기를 버릴 때 큰 소리로 망신을 줘야 했을까? 다음에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행동해야 그런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낄까? 별별 질문들이 나를 괴롭혔다. 쓰레기 버린 사람은 발 뻗고 잘 텐데, 그걸 본 사람만 속앓이 한다. 그게 억울했다. 안 좋은 일이 벌어지면 끌어안고 끙끙거리는 버릇에 대해 고민할 때, 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분 안 좋으면 너만 손해야.”


그 말을 떠올리자, 귀신같이 다운된 기분이 괜찮아졌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다음에 그 할아버지가 똑같은 행동을 하면 ‘불꽃 샤우팅‘해야지. 다짐하고 빨리 다음 기분으로 넘어갔다. 기분에 좌우되는 게 단점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재빨리 다른 모드로 넘어가기도 한다. 2km, 3km 달리면 달릴수록 출발지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다운된 기분에서도 멀어졌다. 달리는 동안 생각했다. 내 기분을 빠르게 진정시켜 주는 건 뭐지? 먹는 거... 그래 그럼 오늘 집에 가면 뭐 먹지? 감자 사둔 게 잔뜩 있으니까 감자랑 양파, 대파 가득 넣고 수프를 끓여야겠다. 굴러다니던 파마르메산 치즈 가루랑, 그라나파다노치즈, 슬라이스 체더치즈까지 넣어 치즈 감자 대파 수프를 만들기로 결심하자 머릿속에서는 수프 만드는 순서가 시뮬레이션 됐다. 쌀쌀한 날씨에 뜨끈하고 감자 수프라니. 먹지도 않았는데 속이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수프로 머릿속을 꽉 채우니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장악했던 쓰레기 빌런 할아버지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무사히 10km를 달렸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했다. 땀에 젖은 운동복을 세탁기에 넣어 돌리는 사이 화장품을 바르고, 머리를 말렸다. 개운해진 몸으로 감자를 깎고, 올리브유에 양파와 대파를 갈색이 나도록 볶았다. 전자레인지로 익힌 감자와 볶은 양파, 대파를 우유와 섞어 믹서에 갈았다. 다시 냄비로 옮겨 뭉근하게 끓이면서 ’ 치즈 삼총사‘를 넣어 원하는 농도가 될 때까지 젓는다. 집 안에는 고소하고 따뜻한 향으로 채워졌다. 버터 한덩이와 후추, 소금을 넣어 마무리. 냉동실에 박혀 있던 호밀빵을 살짝 구워 푸짐하게 담은 수프에 곁들였다. 크게 한 입 떠서 넣었다. 꽃샘추위와 쓰레기 빌런 때문에 얼었던 몸과 마음이 스르르 녹았다. 따끈한 수프 하나로 다운된 기분이 돌아오다니 내 기분은 가성비가 좋아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