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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삐삐 May 14. 2021

선생님, 우리 아빠는 안 그래요

좋은 경험으로 가득하라

요새는 교사들이 담임업무를 기피하기에 임신 등으로 휴직이 예정되어 있거나 업무량이 많은 부장교사가 아닌 이상 교과 자리를 얻기 어렵다. 그런데 나는 올해 시간선택제라서 교과일 수밖에 없었고, 3학년 영어를 맡게 됐다. 어느덧 1학기 중반, 우리는 'How many apples?' 단원에서 물건의 개수를 묻고 답하는 표현을 공부하고 있었다. 요즘 교과서는 양성평등을 추구하고, 삽화 하나하나까지 각종 차별적 요소들이 최대한 제거되었다. 특히 영어교과서의 경우 인종까지 공평하게 배분하여 등장인물들을 설정한다. 오늘 수업에는 백인 가족이 등장했는데, 아들이 냉장고에서 토마토 3개가 놓인 접시를 한 손으로 꺼내다 두 개가 땅에 떨어져 깨졌고 그걸 본 아빠가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 빠 : How many tomatoes?

/아들 : Three tomatoes. (떨어뜨리고는) Oops! I'm sorry.

-아빠 : That's ok.


그 장면이 끝나기 무섭게 일부 아이들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아빠가 어딨어? 우리나라 사람은 안 그래.

그러자 일부는 반박했다.

-우리 아빠는 그러는데?


본인 아빠는 영상 속 아빠의 모습과 다르다는 아이들이 목소리를 낮추지 않자 내가 물었다.

여러분 집에서는 안 그래요?

여기저기서 답을 한다.

- 야~~~! 하고 소리 질러요.

-혼나요.

-한 대 맞죠.

-죽어요(!)


이 10초짜리 영상에서는 how many와 oops! 만 짚고 넘어가면 되는 것을, 아이들은 뜻밖에도 '미국 아빠는 친절하다(?)'를 걸고 넘어지며 자기 집 얘기를 거침없이 했다. 거수를 해보니 '우리 아빠는 이 아저씨 같은 사람이다'가 절반, 그 반대가 절반이었다. 요즘은 개인정보 우위의 시대라 담임교사가 옛날처럼 학생들의 가정사를 알 수가 없는데, 나는 담임도 아니니 이들에 대해 아는 바가 전무하다. 그래서 별도의 코멘트를 달지 않았는데, 아이들은 제법 진지했다.


나는 올해 아이들의 고정관념 몇 가지를 알게 됐다. 우리 학교 3학년은 원어민 교사가 격주로 한 시간씩 들어오는데, 원어민이 자기소개를 할 때 '집에 강아지를 안 키운다, 커피를 안 마신다'라고 하니 모든 반에서 술렁거렸다. 미국 사람들은 당연히 강아지를 좋아하고, 어른들은 당연히 커피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로서 하나가 더 추가됐다. '미국 아빠들은 친절하다'였다. 그런데 얘들아, 우리나라 아빠들도 요새는 다들 그러시니 않니? 


아이들은 현재 만 9세인데, 어린이집부터 사회생활이 시작되고 일찍부터 미디어 등을 통해 수많은 정보에 노출됨에 따라 다들 일찍부터 똑똑하다. 1학년이라 해도 '우리들은 1학년'을 배우던 옛 시절의 그 여덟 살들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 순수하고, 자신이 경험하고 느낀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걸 묵직이 받아들여야 한다. 아이들이 한시도 빠짐없이 좋은 사람들과 양질의 환경에 둘러싸여 자라야 하는 이유다. 적어도 우리 아빠가 '항상 친절한' 미국인이라면 좋겠다는 말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잠깐. 아이에게 '잘해주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spoiled' child가 되게 내버려 두는 것은 명백한 '방치'다. 제 때 필요한 훈육을 안 하는 건 사랑으로 포장될 수 없. 식당에서 뛰어다니거나 친구에게 함부로 하거나 어른들께 무례한 행동을 하는 걸 알고도 가만두는 건 정말 최악의 양육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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