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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삐삐 Jun 24. 2021

금쪽아, 내 말이 들리니?

우리 대화할 수 있을까

<오베라는 남자>를 통해 프레데릭 배크만 작가의 팬이 되고 그의 책을 완독하겠노라 목표한 지가 오랜데, 시작하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끝을 봐야 하는 성격 덕에 늦게 돌입한 것치곤 빨리 여러 권을 마쳤다. 올핸 수입도 반토막이니 책값이라도 아끼자고 도서관에 갔는데 다행히 원하는 것들이 다 제때 들어와 있어 감사히 가방에 들쳐 메고 집으로 왔다. 그 탓에 승모근은 주제도 모르고 한 단계 더 상승했다. 누가 시켜서 이 '짐짝'을 날라야 했다면 나는 얼마나 신세한탄을 했을까. 오, 너 간사한 인간이여. 작년엔 코로나라고 문을 안 열더니 올해는 한 번에 5권에서 7권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이 책들을 찾으며 그 위아래 칸으로 눈길을 끄는 제목들을 보니 요나스 요나손,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 등 스웨덴 작가들의 책이었다. 나의 로망 말괄량이 삐삐를 탄생시킨 아스트리드 린드그렌도 그 나라 사람이라 아무래도 나는 그쪽 주파수인가 보다. 결과적으로 나는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아 바빠졌고, 나는 몇 주를 통째로 헌납하여 문자의 세계에서 놀았다. 


비교적 단 기간에 대서사시 여러 개를 마스터하는 동안 나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허구의 세상에서 만났다. 의도친 않았지만 그중엔 아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아무리 소설이라 해도 '일반적'인 애가 없었다. 우열을 가리긴 힘들지만 그래도 아주 우월한 순위에 있는 캐릭터가 바로 엘사였다. 나는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평범한 월요일 밤에도, 엘사가 늘어놓는 수많은 궤변들을 중간에 끊지 못해 주경야독을 이어갔다. 그런데 잠깐 졸던 중 이 대목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엘사는 수업이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자리에 남아서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말이 돼야지, 실은 선생님 혼자 열심히 횡설수설하는 거였다.

- 프레드릭 배크만,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에 달랬어요> 중에서


긴 세월, 나를 고뇌케 했던 많은 금쪽이들도 나와의 독대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정말 그랬겠다 싶어 허탈하면서 뒤통수를 한 대 꽝 맞은 듯했다. 왠지 모를 민망함이 찾아왔다.


학교에서 발생한 사안 중 그 증거가 명확하여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것일지라도 어떤 아이들은 끝까지 거짓말을 한다. 웬만한 교사들은 기본적으로 오은영 박사님의 보송보송한 말투, 그 아류 정도는 되게 대화를 시도하는데 그 의도가 '너의 잘못을 털어놓고 인정해. 그럼 넘어갈 거야'임에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발뺌만 하는 학생들이 많다. 그럼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던 교사의 꾹꾹 눌러진 화는 폭발 직전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고 이걸 분출하면 안 된다. 우린 매사에 '교육적' 효과를 내야 하는 프로니까. 그리고 요즘 세상엔 이유 불문하고 큰 일어날 일이니까. 대신 그런 식의 화를 속에 쌓아두는 교사들이 많다는 점에서 감정노동자로서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래도 선생님이 조곤조곤 말하면 순순히 털어놓고 그 대상이 교사든 친구든 사과 또는 반성을 하고 깨끗이 끝내는 학생들이 더 많아 다행이다. 


어떨 땐, 분위기 좋게 대화가 잘 흘러가는구나 했는데 결과적으로 나 혼자만의 하소연이었구나 싶을 때도 있었다. 좋지 않은 이미지로 학교에 소문이 자자했던 어떤 학생이 우리 반이 되었을 때 나는 많이 긴장했었다. 툭 치면 반사적으로 거짓말이 나오는 그 학생 때문에 부글거릴 때가 많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독대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그때마다 아이는 넋 나간 표정을 짓곤 했다.


"선생님 마음 이해되니?"

"네"

"괜찮으니까 솔직히 말해봐"

"..."

"선생님 마음이 이해돼?"

"..."

"모르겠지?"

"솔직히 모르겠어요"


나는 웃음이 터졌고,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따라 웃었다. 그래도 이거라도 사실대로 말해줘서 고맙다. 그 아이가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부족해 사람들과 갈등이 많은 탓도 있지만, 그러고 보니 내 말이 장황하긴 했다. 그때 그도 엘사처럼 '선생님 혼자 횡설수설'이라고 생각했을까. '앞으로 더 잘하자'는 말을 하기 위해 나는 '선생님이 너를 미워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오해하지 마'를 우선적으로 인식시켜야 한다고 봤고 그러다 보니 말들은 몇 배가 불어났었다. 그런데 그게 그리 효율적이지도 효과적이지도 않은 노력이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혼을 내고 나면 나는 심각한데 아이들은 돌아서는 그 순간 다시 웃음을 되찾고, 그걸 본 나는 좀 전까지 마음 졸여가며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실었던 것이 억울했었다. 공기보다 가벼운 그들의 상황판단력에 공허해지고, 스위치 전환이 빠른 그들의 감정 시스템이 부러웠었다. 나는 정말 '헛수고'만 한 것일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고, 다들 내 맘 같지도 않다. 행정과 인정은 다르다는 윗분의 조언도 크게 와닿는다. 상대가 남녀노소 누가 되더라도 일에 있어 감정을 최대한 빼야 회의감과 병치레에서 최대한 자유로울 것이다. 그러나 직업에서만큼은 '친절하고 재미있는'이라는 수식어가 탐나는 사람이라 어째 구구절절 대화 패턴을 쉽게 버리지 못할 것 같다. 거기다 직업적 의무에 연연한 측은지심까지 습관적으로 개입되니 그 딜레마는 깊고도 넓다. 그냥 지금은 어차피 잘 실천되지도 않을 냉정함을 구하기보단, 애들이 거짓말만 안 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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