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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삐삐 Aug 11. 2021

공무원이라고 다 그러진 않습니다

철밥통 소리 자존심 상하지 않나요?

9살 조카는 방학을 하고 고모네서 며칠, 할머니네서 며칠, 합쳐서 일주일 정도 제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 나도 조카의 동선 안에 있었다. 조카가 제 엄마와 집으로 돌아간 후, 나는 조카가 내 잔소리에 반감만 안고 돌아갔겠다 싶어 후회가 됐다. 일 년에 며칠이나 본다고 이런저런 말을 그렇게 많이 한 지.


올케가 방학 숙제 좀 봐달라고 보낸 것들엔 독서록과 수학 문제집이 있었다. 그런데 공부하기 싫어하고 유튜브에 빠져있는 꼴을 보니 속이 터졌다. 유치원 때까지는 영재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된 거지? 내 새끼도 아니지만, 제 부모가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 집 아이니 나로선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그동안 가르쳤던 2학년 학생들 자동으로 떠오르며 조카가 그 '탁월한'아이들의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걸 보니 애가 탔다. 좋게 말하면 교육시킬 부분들이 나름 전문가의 시선으로 바로 캐치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가르쳐야 한다는 교사의 고질병이 활개를 친 것이다. 참고로, 교사 자녀들은 모범생이나 문제아 둘 중 하나로 자란다는데 그런 의미에서 내 자식은 어느 쪽이 될까 예전부터 많이 궁금해하고 있다.


조카의 숙제 중 하나는 매일 책 한 권을 읽고 학교에서 제작한 독서록에 한 줄 감상평을 쓰는 것인데 그간 쓴 걸 떠들쳐보고 나는 경악했다. 본인도 무슨 글씨인지 모를 만큼 엉망진창으로 써놓고, 내용도 주어만 빼고 거의 똑같았다. 숙제 검사를 하다 보면 엄마가 옆에서 봐준 애와 그렇지 않은 애가 바로 구분되는데 우리 조카의 경우는 후자인 게 뻔했다. 자꾸 싸우게 된다는 제 엄마의 고충을 이미 들은 바 있기에, 엄마가 옆에 앉아있지 않고 본인이 숙제를 했다는데 의의를 둔 것이다. 학교 가서 혼나면 스스로 깨우치기 바라는 마음에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아닐까.


- 선생님이 이거 보고 아무 말 안 하셔?

= 네

- 진짜?

= 네


나는 낙서 같은 조카의 글씨보다 선생님이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게 더 놀라웠다. 아예 보지도 않았거나 보고도 넘긴 건데, 친구이자 동료 이에게 이 얘길 하니 "그 사람도 우리와 똑같은 입장이야. 그 사람도 직장생활 그냥 하는 거지 뭐"라고 태연히 말했다. 야, 다 그렇진 않아, 나도 안 그래!!


그런데 이걸 반성이라고 해야 하나 깨달음이라 해야 하나. 나는 내가 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직장생활을 했는지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사실 알고는 있었지만, 과한 정의감 혹은 의무감 때문임이 분명했다. 건, 가 '선생' 소리를 듣는 한 으로도 게 고쳐지지 않을 것 같다.


아무리 학교에서 칭찬만 하는 시대라 해도 조카가 학교에서 한마디 조언이라도 듣고 왔다면 어땠을까 싶다. 요즘은 선생님 말이 효력 없는 시대지만 그래도 아직 저학년에겐 유효한 존재이니 슬쩍 기대의 손을 내밀어 보는 것이다.




그저께 , 백신 2차 접종 날짜가 개학 후로 연기되었으니 너도 내일 전화해서 스케줄을 미리 변경하라고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리 학교에선 아직 연락 안 왔는데? 그녀의 카톡이 아니었다면 한참을 더 모르고 있을 뻔했다. 우리 학교는 지금 공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후엔 교사들을 재촉하겠지, 수업에 지장 없게 하라고.


어제, 1339는 불통이고 가까스로 동네 보건소와 연락이 닿아 변경을 문의했더니 전날 오후에 공문이 내려와서 변경이 전면 금지되었단다.


- 어제 제 동료는 바꿨다는데요?

= 공문이 오후에 왔어요. 저희도 해드리고 싶은데 공문이 온 이상 어쩔 수가 없네요. 안 그래도 민원전화 때문에 죽겠어요. 죄송해요.

- 공문이 그렇게 온 걸 어쩌겠어요. 알겠습니다. 고생하십니다.


'공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나는 그녀의 부연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그 입장이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나도 작년부터 학부모들이 '우리 학교는 어떻게 되는 거냐'라고 문의하면 늘 궁색하고도 답답한 대답만 멋쩍게 내놓았으니까.

- 어머니, 저희도 뉴스 보고 알아요. 가정에서 아시는 만큼밖에 몰라요. 뉴스에서 나오고, 교육청에서 공문 오고, 학교에서 방침 나오면, 그 후에 저희도 알게 돼요. 다음에 말씀드릴 수 있어요. 죄송해요.


그렇다. 내가 사는 조직은 '공문'으로 움직인다. 신규 때 관리자께서 말씀하셨다. "공무원은 서류로 말한다"


교사는 일반 공무원들과 성격이 다르지만 어쨌든 공무원이고, 십 년이 넘게 이 에 있다 보니 무슨 의미인지 나도 잘 알고 있다. 서류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고, 서류만이 나를 지켜준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도 쓸데없는 서류 작업, 탁상공론 등을 거부할 수가 없다. 이것이 직업의 특성이라 배워왔고, 앞으로도 집단의 성격은 변 않을 것이며, 양심과 현실타협 사이에서 나는 치열히 고민할 것이다. 사람들이 왜 저리 무기력하다고 욕만 할 순 없다. 잔다르크처럼 나섰다 혼자 고초만 겪고 끝나는 걸 너무 많이 봐왔던 게 독이 되었을 것이다. 나도 이렇게 기성세대가 되어가는가. 오, 두렵다.


오늘, 다른 보건소에 문의했더니 스케줄 변경이 가능했다. 어제 우리 동네 그녀는 공문에 너무 충실한 직원이었을까, 공문 해석을 잘 못한 것일까.


한 번도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삼십 대 중반의 친척 동생이 몇 년째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다. 그가 그 직업을 원하는 이유는 남들이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이유와 같으며, 나는 그 길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고 줄곧 해왔다. 물론, '지는 공무원이면서'라는 볼멘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흘리듯 조심히 내뱉는다.


8월, 학교에 안 가는 동안 학교 밖에서 학교를 바라본다. 그 안에서 행복했던 순간도 많았고, 쓰라린 시간도 많았다. 모든 것은 현재진행형이다. 양심 있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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