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랑한삐삐 Sep 18. 2021

그 바다가 나를 부를 때

포르투갈 - 호카곶(Cabo da Roca)



산과 바다 중 고르라면 저는 무조건 산이었어요.

바다에 대한 로망이 없었거든요.

 고향은 바닷가예요.

익숙한 게 더 그리운 이들도 있겠지만

저는 반대였어요.

바다가 생의 터전인 사람들을 보며 자라다 보니

그게 그저 응시의 대상이거나 휴가철 물놀이 장소가 아닌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받아들여졌거든요.

내 부모는 어업이 아니지만

할아버지가 바다에서 여러 번 고비를 넘기셨다는 얘긴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 제게 지각 변동의 감정이 찾아옵니다.

포르투갈에서요.

여행지로는 그 옆 나라가 더 유명하지만

저는 예전부터 이 나라에 더 끌렸어요.

아날로그와 낭만이 살아있는 유럽의 서쪽 끝.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나오기 전부터

저는 리스본을 동경했죠.

초등학교 때 부루마블을 하면서 처음 알게 됐는데

어디 있는지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이름 자체가 좋았던 것 같아요.


어느 해 1월 1일, 저는 리스본에 있었어요.

공휴일이라 별 계획을 안 하고 있다가 정오가 가까울 무렵,

신트라(Sintra)행 기차를 탔어요.

당시 티켓 기계도 고장 나고 여행객들도 많아

역이 엄청나게 소란하고 줄이 줄지를 않았던 게 기억나네요.

아무튼 신트라까지 무사히 도착해 버스로 갈아탔고

저는 마침내 호카곶에 도착했어요.


버스에서 내려 사람들을 따라 바다 쪽으로 걸어갔는데,

이게 뭐죠?

바다는 내가 보고 자란 그런 바다가 아니었어요.

전방에 바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고깃배도, 섬도, 사람도, 갈매기도, 육지와 이어진 그 어떤 것도.

오직 광활한 바다뿐이었습니다.

저는 속이 점점 시원해졌어요.

가슴이 벅차 올라 터져버릴 것 같았지요.

심박수도 빨라지는 것 같고 숨도 가빠지더군요.

옛날에 왜 여기를 지구의 끝이라 믿었는지

삼백프로 납득이 되었어요.

누가 감히 이 너머에 다른 땅이 있다고 믿었겠습니까.

저 바다를 호령하려 떠난 탐험가들의 용기와,

시야에서 돛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배웅객들의 기도가 이 바다 위를 가득 메웼을테죠.


늦게 온 탓에 금방 노을이 지고 해가 졌어요.

깜깜해지고 버스도 막차라 더 있을 수가 없었어요.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아쉬웠어요.

내 평생 이 바다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이만큼의 쾌감을 다른 데서 느낄 수 있을까?

갑작스런 만남, 짧은 인사라 더 강렬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때 내 감정이 왜 그렇게 고조되었던건지 저도 정확히는 알 수 없어요.

어쨌든, 제 일생 손에 꼽는 느낌이란 게 중요한거니까요.


그 후 포르투갈에 또 가진 않았어요.

기회가 없었다기보단

이 넓은 세상, 못 가본 곳부터 가자는 주의라서요.

그리고 두 번 가면 감동이 이전과 같지 않다고 해서요.

좋아서 리바이벌했다가 실망했던 적이 여러 번 있기도 하고요.


그래도 언젠간 꼭 다시 가보고 싶어요.

그땐 아침 일찍 가서 오래 있다가 오고 싶어요.

당장은 전세계에 희뿌연 안개가 두껍게 드리워져 있지만

인생 길게 보면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죠.


그 바다가 그리워요.


매거진의 이전글 걱정마, 네 뒤엔 내가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