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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삐삐 Sep 28. 2022

라이어(Liar) 일병은 구하되

어머니, 귀댁의 자녀도 거짓말이 가능합니다

여름방학 첫 주에 영어캠프를 담당한 나는 원어민과 함께 3학년 수업을 했다. 원어민이 선정한 소재는 흥미로웠고 그녀의 준비성 또한 철저했다. 한편,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활동인만큼 교사의 손이 많이 가고 영어 난이도가 전반적으로 중 이상이라 내 한국어 설명이 생각보다 많이 개입되었다. 캠프의 셋째 날인 수요일. 막 퇴근을 했는데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아까 수업 중에 어떤 여학생 엄마가 학교로 전화를 해서 나와 통화를 원했는데 수업 중이라 못 바꿔줬다는 것이다. 내용인즉슨, 선생님이 수업 중 어떤 학생들에게 벌을 주었고 너희들도 잘못을 하면 벌을 준다고 했다며 선생님이 무서워 학교에 가기 싫다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그 아이가 결석을 했었다. 캠프가 무료였는데 예년과 달리 신청률이 낮아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도 무단결석을 하거나 가족여행으로 못 온다는 연락이 오곤 했는데 오늘의 빈자리 하나는 그 아이의 것이었다. 그 여학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번에 캠프를 통해 처음 봤는데 지난 이틀간 교실 맨 앞자리에 앉고 유난히 질문이 많아 20여 명의 학생들 중 나와 대화를 가장 많이 했고 본의 아니게 내가 에너지를 가장 많이 쏟았던 아이였다. 나는 민원이라길래 전 날 수업 중에 싸웠던 그 애들 집에서 온 줄 알았다. 명백히 그 아이들의 잘못이었고 혼났다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주의'였지만 여기는 민원이 백화점을 이루는 학교라 그것 또한 걸고 넘어지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그래도 교실엔 내 '무죄'를 증명해줄 스무 명 가까운 '증인'들이 있었으니 거리낄 건 없었다. 그런데 누구라고? 내가 그 아이에게 한 마디라도 싫은 소리를 했거나 친절히 응대를 안 한 순간이 있었다면 이해라도 하겠다. 알만한 사기꾼한테 사기를 당했으면 거기에 넘어간 내 어리석음을 탓하겠지만 믿는 도끼에-믿었다기보단 상상조차 못 했던-발등이 찍힌 나는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통화를 한 번 해보는 게 어떻냐는 실무사님의 말에 나는 보류를 알렸다. 이미 퇴근을 했기 때문에 내 핸드폰을 써야 하는데 안 그래도 업무폰을 따로 쓰지 않아서 여기저기 다 팔린 내 번호지만 이런 '모함'에까지 내 개인정보를 넘기고 싶지 않아 내일 처리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학교에 왔다. 그리고 이전처럼 질문을 던졌고 나로부터 가장 많은 지식을 가져갔다. 나는 어제와 관련된 언급을 일절 하지 않 이전의 분위기를 유지했다. 오피셜은 아니지만 이쯤 되면 어제의 이유가 밝혀진 거 아닌가? 애는 그냥 어제 아침에 학교에 오기 싫었던 것이다. 내가 엄마라도 아이가 그렇게 말한다면 흥분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곧바로 수화기를 드는 건 다른 차원이라고 본다. 내가 담임교사였다거나 좀 더 교육적 차원의 욕심을 냈다면 이렇게 넘어가진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앞으로 이틀만 더 보면 더 이상 이 아이와 만날 일이 없고 사실 확인차 얘기를 꺼내는 자체가 아이에게 부담이 될 수 있음을 고려하면 어떤 어색함도 드러나지 않는 게 낫다고 봤다. 학생들 하교 후 교감님께 상의를 드렸는데 '선생님이 억울하지 않겠냐'는 말씀이 있었지만 나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이후 민원인과도 통화하지 않았는데 학교에 또 전화가 안 온 걸 보면 그쪽의 결론도 내 것과 같아 보였다. 솔직히 전 같았으면 어제 상황을 인지한 즉시 사실무근임을 '호소'했을 텐데 나름 경력교사라고 그간 쌓인 스크래치들이 내 대처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찔러보고 질러보는 행태에 자존심이 너무 상하지만 뭐 어쩌겠나. 이래도 교사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을 텐가.


'네가 납득시킬 수 있는 상대였다면 애초에 그런 일을 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냥 넘어가, 설명해서 뭐할 거야, 사과받아서 뭐, 어차피 다 자기 주관적으로 해석하게 되어있어, 앞으로 수도 없이 겪을 일이야'

선배들의 조언은 직장 생활 중 내가 만나는 다양한 상황에서 내 멘 안정화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특히 이번 일과 관련해선, 이 시기의 아이들은 성장과정상 원래 거짓말을 많이 하고 악의 없는 위기 모면용이니까 상처받지 말라는 말도 여러 번 들어둔 터였다. 이렇게 내 '학습'경험이 또 한 번 쌓여가는데 나는 다만 이게 '무기력'으로 결론지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학습된 무기력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니까. 그저 '웃픈' 지혜라고 두자. 


바야흐로 상담의 시대. 오은영 박사든 강형욱 훈련사든 보호자의 양육태도를 가장 강조하시는데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특이 케이스가 아닌 이상 자식에게 애정 없는 부모 없고 다들 공부보다 인격이 우선이라고 가르친다. 교사들도 아이들의 악의 없는 거짓말에 최대한 상처받지 않고자 멘탈을 붙잡고 있다. 그래도 소망하는 바는, 천하보다 귀한 내 아이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염두하시고 누가 봐도 비상식적인 얘기를 할 때는 부모님들이 당장 화를 내며 학교에 전화를 할 게 아니라 한 번은 의심해보시면 좋겠다. 벌써 몇 년 전이지만 애가 아빠한테 혼날까 봐 거짓말 한 걸 곧이곧대로 믿고 술 먹고 밤 10시에 담임에게 전화해 항의하던-순진하게도 나는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고 황급히 받았다- 어떤 아버지가 떠오른다. 이후 그 분과 다시 연락할 일은 없었고, 그 애가 중학생이 된 후 나를 찾아와 그때 사고 많이 쳐서 죄송하다고 해서 마음이 다 풀리긴 했다. 런데, 트체크도 없이 선생을 감정 쓰레기통 삼던 그때 그 아버지그 후 이불킥을 했을까 안 했을까 궁금하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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