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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삐삐 Sep 27. 2022

선생과 쫌생이

생활인이자 이상 추구자의 완벽한 역할놀이

신규 교사 월급이 2백이 넘는다는 걸 안 지 몇 년이 되긴 했다. 후배들은 여태 자신의 지인들에게 '고작 그거?'만 듣고 살다가 '그렇게 많이 받는다고?' 하며 충격받은 내 모습에 더 충격을 받았다. 6년 차가 되어서야 실수령액 2백이 되던 고인물 연차인 걸 어쩌랴. 후배들은 현재의 내 월급을 듣더니 표정 어두워졌다. 아, 그렇구나, 하, 하, 하하하하. 허탈한 웃음 교환의 현장이었다.


보통의 직장인들은 연봉협상이란 걸 하고 연봉이란 일반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그러나 나는 공과에 상관없이 일률적인 호봉제를 적용받는 공무원이고, 작고 보잘것없어 봬는 내 월급 희망적이진 않지만 적어도 그에 대해 부끄러운 적은 없. 내가 신규일 때, 약사 구가 어쩌다 내 월급을 듣고는 거짓말하지 말라며 코웃음을 쳤다. 전산상의 오류 아니냐며, 너는 그동안 니 월급도 못 받아먹고 살았냐고, 그게 이 시대에 가능한 액수냐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내가 백만 원 후반대를 받으며 5년을 줄곧 일할 때 그녀는 처음부터 내 더블을 벌었다. 아무리 공무원임을 감안한다 해도 이 시대에 '교사'는 직업으로서 호가가 높고, 사치엔 관심 없어도 하고 싶은 건 꽤나 하고 사는 나를 보고 구는 자기만의 수치를 설정해두었을 터였다. 만약 내 급여체계가 조금이라도 성과를 반영하는 것이었다면 나는 그녀의 말에 자존심이 엄청 상했을 거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내 꿈이 무엇이었는지는 차치한다. 다만 나는 교대 커트라인이 최고조일 때 입학한 학번이라는 의미 없는 자부심을 아직 버리지 않았고 약간의 소명의식도 있고 몇 가지 이유 조각들이 덧대어져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 이직 욕구는 신규 때부터 꾸준하지만 그 동기가 돈이었던 적은 없었다. 이것은 내가, 교사는 경제적으로 매력적인 직업이 아님을 인지한 상태에서 대학을 선택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조금 거창해지자면, 숫자보다 가치를 잡고 싶었달까. 그런데 이게 고질적인 부작용도 가져왔는데, 내 수입에 너무 기대감이 없어서인지 통장에 찍히는 돈만 확인할 줄 알고 지금도 월급 명세서를 완벽히 해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행정실의 착오도 있다 해도 누군가 알려주지 않는 이상 알아채지 못하는데, 이것도 집단의 성격인지 그동안 내가 만나온 교사들 모두가 그랬다. 다행히, 초등교사 커뮤니티에 보면 누군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고 그에 대해 정확히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 가끔씩 얻어듣곤 한다.


사람들은 방학과 연금이 교사들의 아킬레스건인 양 그걸 가지고 늘 비난하지만 자신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교사로 재직 중이라면 절대 그런 말 못 할 거다. 물론 욕먹을만한 미꾸라지들은 어느 공동체에나 있고 학교 사회도 다를 바 없다. 젊은 교사일수록 자신이 이 일을 기꺼운 마음으로 정년까지 할 수 있을 거라 예상하는 이들은 얼마 안 될 텐데 그 와중에 "야, 우리도 저렇게 하면 정년까지 갈 수 있겠다"하는 비아냥을 자아내는 선후배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직장생활이란 원래 지뢰밭 같고 겪어보지 않은 이상 남의 하소연은 푸념이라는 일뿐이라는 전제하에 팩트만 얘기하면 학기 중엔 개인적 사유의 연가-나는 이제껏 아들 군입대라 허가된 사례밖에 못 봤다-를 전혀 쓸 수 없고 8월과 1월에만 연속된 일정으로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 연봉을 12개월로 나눠주는 거라 실상 방학 때 월급루팡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젊은 교사일수록 선택권만 있다면 다들 공무원연금에서 탈퇴하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소득이 얼마나 된다고 9프로나-개인과 정부 각각 4.5%-떼고 정년이 62세인데 연금수령은 65세부터이고 예상 지급률도 떨어지는 추세이고 무엇보다 재원 고갈을 뻔히 아는데 누가 연금에 목을 맨단 말인가.  


나는 교사들이 많이 사는 지역 중 하나로 첫 발령이 났고 이후에도 그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교사들의 실거주율이 높다는 건 발령 경합지이자 평균 연령이 높아진다는 의미인데 우리 학교는 교감이 두 분인 큰 규모였는데도 내가 3월 발령이 난 후 9월에 두 명이 나고 그다음 해부터 4년 내내 신규가 안 와서 나는 첫 학교에서 내내 막내였다. 그런 환경 덕에 나는 내 직업적 특성을 더 금방 파악할 수 있었고 더불어 내 미래도 빤히 그려졌다. 우리나라는 돈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 문화이고 나도 남과 금전적으로 얽히지 않는다. 나도 공짜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남의 호의를 덥석 받아들이는 성격이 못되는데 한 번의 호의에 두 번 이상을 갚아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엄마 같은 큰 손은 못 돼도 최소 테이크(take)에 대한 기브(give)는 확실한 편이다. 그런데 이건 내가 속한 직장 구성원들의 성격이기도 하다. 동료들은 대부분 성실하고 알뜰하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개인 간 월급 차이는 오직 연차에서-수당이 발생하는 업무들이 없진 않으나 거의 차출된 인원으로 구성되고 경험상 가계 수입에도 그럴듯한 보탬이 안된다-오므로 가족의 재력, 개인 재테크의 영향을 제외한 순수입만큼은 경력차가 웬만큼 나지 않는 한 다들 거기서 거기다. 일 자체가 독립적-내 반은 내가, 네 반은 네가-이고 퇴근 시간 이후로는 터치도 거의 없다. 그래서일까. 서로 밥을 사는 문화도 별로 겪어보지 못했고 디폴트가 더치페이다. 이게 '인색'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이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시대 분위기까지 고려해보면 이젠 나름 합리적이고 깔끔한 분위기라 자평하는 바다.


올해 보직교사가 되어 많은 실무의 총책임을-물론 학교의 최종 책임은 모두 교장님에게 있다-맡으며 여러 예산을 사용하고 여러 외부 인력을 선발했다. 내 돈도 아니고 결재라인에 여러 명이 있고 단 1원의 오차 발생도 불가하니 나는 단숨에 암산 가능한 덧셈도 기어코 계산기를 두드려보는 강박이 생겼다. 구인을 올리면 지원서가 많이 들어와 우리 주변에 구직자가 많다는 것도 실감하고 예술강사들의 시급이 우리의 두 배 이상이라는 것에 현타도 오고 아무튼 수업에만 집중되어 있던 내 시야에 불어온 낯선 바람이라 하겠다. 운동회 업체 대표님과 견적서를 주고받다가 내가 물품 대여비 중 2000원만큼은 취소한다고 수정을 요청하니 대표님은 "저랑 부장님이랑 천 원씩 내는 걸로 하죠"하시는데 왠지 뼈 있는 웃음처럼 느껴졌다. 솔직히 나도 공무원이고 선생이지만 공무원들 일하는 방식이 답답하고 틀에 딱딱 맞추는 교사 이미지에 현기증 나는 사람인데 수화기 너머의 그 사업가분에게 내가 딱 그렇게 비칠 것 같았다. 저번에도 이와 비슷하게 "저랑 부장님이랑 2만 원씩 내죠 뭐" 했던 적이 있어서 전혀 근거 없는 피해의식은 아니었다고 본다. 행정실에 들른 김에 이 얘길 하니 "당연히 정확히 맞춰야지 그 사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지금"하며 만약 그가 나를 쫌생이로 봤다면 그건 그의 잘못임을 명확히 해주었다.


영화 '선생 김봉두' 속 선생들은 옛날에 학교를 떠났다. 촌지의 최후 피해자들은 진작에 성인이 되었다. 그런데도 그와 관련해 아직 옛 기억에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을 간혹 접하게 된다. 한국 사회의 병폐였고 원래 나쁜 기억은 오래가는 법이고 나도 학생일 때 교사들 부정 많이 봐서 이해는 된다. 공무원들은 매년 필수적으로 청렴 연수를 받는데 교사에 관한 내용 사례 중 이런 게 있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학부모가 작정하고 처벌 기준 3만 원에 맞춰 금품을 준비해 건넸고 교사는 그걸 받았고 학부모는 신고를 했고 교사는 징계를 받았다. 참으로 추잡스러운 짓이다. 신뢰가 무너진 교육현장의 단면이자 스스로 명예를 실추한 어리석은 자의 예를 보며 우리는 누구 하나 명확하게 표현하진 않았지만 다들 이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야,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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