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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삐삐 Sep 26. 2022

학교니까 좀 봐주세요

가을 운동회가 남긴 것

지난주, 우리 학교에서는 2018년 이후 4년 만에 가을 운동회가 열렸다. 우리 학교는 운동회와 학예회가 격년으로 열리는데 2018년에 운동회, 2019년에 학예회, 2020년은 코로나로 생략, 2021년은 약식의 학예회, 그리고 마침내 2022년 대운동회를 맞이하였다. 따라서 올해 학교의 가장 큰 행사는 당연히 운동회였고, 이것은 담당부장인 내게 가장 큰 짐이자 내 업무의 피날레-물론 학년도가 끝날 때까지 행사들이 대기 중이고 매일 공문은 착실히 쌓이겠지만-였다.


우리는 게임 진행에 전문업체를 이용했고, 이 결정은 교사들의 업무경감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학교 구성원들 개별에게 돌아간 혜택에 비해 담당부장인 나에겐 크게 와닿지 않았다. 일례로 원래 게임은 각 학년에서 준비하는 것인데 이걸 업체에서 진행하는 것이라 교사들은 여기에 동원되지 않으므로 일을 덜게 된 것이고, 내 입장에서는 업체와 교사들 사이에서 의견을 조율하는 일이 더해진 느낌이었다. 물론 내가 이 역할을 처음 맡아본 것이라 이전과의 업무량 비교는 완벽하지 않다. 그런데다 남에게 부탁하는 걸 어려워하는 성격 탓에 그냥 내가 다 해버리는 부분도 있고 사소한 업무라도 누군가에게 배분할라치면 내가 빚쟁이가 된 느낌이 들어 불편을 스스로 자처한 면도 있다.


운동장이 좁기도 하고 아직까진 50인 이상 실외 활동엔 마스크 착용이 필수인 코로나 제한 환경이기 때문에 우리는 3개 학년씩 묶어 각각 1, 2부로 진행했고 학부모는 초청하지 않았다. 대신, 학교 펜스 너머로 어머니들이 많이들 구경 나오셨다. 운동회 준비로 십여 명의 교사들이 출근시간 전 초과근무를 나왔고, 아침 댓바람부터 요리조리 하루 종일 뛰어다닌 덕에 나는 그날 밤 바로 곯아떨어져 숙면을 취했다.


운동회는 성공적이었다. 내가 '성공'이란 말을 자신 있게 붙일 수 있는 이유는 학생들이 너무나 행복해했기 때문이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 아이들이 없었다. 자기 팀이 졌다고 울던 2학년 남학생 한 명도 그 잠깐 빼고는 다시 흥에 겨워했다. 일반적으로 고학년에는 학교에서 뭘 해도 유치하다, 재미없다, 하며 참여의지 자체가 없는 학생들이 있는데 올해 우리 6학년 아이들은 유난히도 순해서 그들마저 정말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나는 정말 학생들이 그렇게까지 기뻐할 줄은 몰랐다. 어린이들의 응원 소리, 웃음소리, 환호 소리는 그간 차곡히 쌓아지던 내 마음 한편 노고의 짐을 다 깨부숴주었고 나를 춤추게 했다. 선생님들도 다 나와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나에게 격려를 보내는 동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애들이 너무너무 좋아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학생들의 반응이 이렇게 좋았던 건 우선 레크레이션 강사의 전문성이 효과를 발휘했음이다. 아무리 유머와 재치가 뛰어난 교사라도 프로에 비견될 수 없고 공립학교 재정상 비용이 크게 들인 행사라 그만큼 기대하는 바가 있었는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우리 학교에서 4년째 일하고 있는 원어민 교사는 한국의 운동회를 처음 경험하는데 재밌어하길래 "Money works!"라고 웃어 보였더니 "I know"라며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그런데 학생들의 신남에는 근본적인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게 확실하다. 그동안 꽁꽁 움츠려있던 그들을 오늘에서야 꺼내 주었다는 것이다. 코로나지구 점령 바로 전인 2019년은 지금의 6학년이 3학년, 5학년이 2학년, 4학년이 1학년이던 해였다. 따라서 이전에 가을운동회 경험한 학년은 5, 6학년뿐인데 그땐 그들이 1, 2학년 꼬꼬마 시절이었다. 아이들은 지난 2년간 야외 체육 수업도 거의 못했고 올 들어서야 모든 교과가 정상적으로 운영됨에 따라 그나마 운동장이라도-사실 우리 학교는 학교장 결정에 의해 코로나 이전에도 운동장 사용에 제한이 많은 특이한 곳이었다- 정기적으로 밟게 되었다. 그렇다면 현재 1학년에서 3학년 학생들은 어떠할까. 이들은 더 처참하다. 내가 각 반 운동장 배치도를 짜서 브리핑을 했을 때 선생님들은 '학생들한텐 줄 서는 것 자체가 감격이겠다'고 하셨다. 이들은 다른 학년과 함께 운동장에 체조 대형으로 서 본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의 3학년은 초등학교에 입학했어도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1학년 시절을 보냈다. 그에 비하면 2학년들은 조금 더 낫다고 해야겠지. 그리고 올해 1학년들은 마스크만 썼지 거의 '제대로 된'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모든 걸 감안할 때 오늘은, 여덟 살에서 열세 살 인생을 살고 있는 그 650여 명의 개별 인격체들에축제의 날이 될 수밖에 없었다. 2부가 시작되기 전 갑자기 소나기가 와서 계획이 급히 조정되었지만 또 거짓말처럼 다시 햇빛이 쨍쨍 비쳐 마무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다이나믹하고 환상적인 하루였다.


그런데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다지. 한창 운동회가 진행되던 오전 중에 잠깐 교무실에 들렀는데 실무사님이 학교에 민원이 두 개 들어왔단다. 민원이 백화점을 이루는 학구인데 솔직히 두 개면 선방이었다. 전화가 학교로도 오고 서울시교육청으로도 가고 우리 행정실과 언쟁 붙고 나중엔 어르신이 학교로 직접 찾아와 항의하셨단다. 시끄럽다는 것이다. 오늘은 마이크와 앰프가 동원되고 음악도 틀고 애들도 소리를 지르는 운동회날이다. 이 마을은 사방이 모두 아파트 단지이고 우리 학교는 아파트 단지 속에 있고 우리 학생들 백 프로가 그 아파트에 산다. 우리 행정실에서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미리 공문을 보내 양해를 구했다. 6학년 학생이 자기 아파트에 운동회 안내문이 붙어있더라고 먼저 말해준 걸 보면 전달은 잘 된 듯하다. 나도 민폐에 극혐이고 소리에 예민하고 소음에 질색하는 사람인데 오늘 우리의 데시벨이 그 정도였을까. 갓난아이가 겨우 잠든 시간에 우리가 떠들었던 것일 수도 있고 각자 사정이 있는 것이니 민원인들에게 무조건적인 이해를 바랄 순 없겠지만 동네 특성상 우리 집 애 아니면 옆 집 애가 지금 몇 년 만에, 어쩜 생에 가장 즐거운 날을 보내고 있는 별스런 순간일 수 있는데 그냥 바라봐 주셨으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이 있다. 사실, 공공장소에서 막 뛰어다닌 것도 아니고 불편한 시간대의 고성방가도 아니고 다들 일 나간 오전에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지 않나.


숨이 너무 찰 수 있으니 달리기 전력질주를 할 때만은 마스크를 벗으라고 권유해도 아이들은 절대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9월 26일부로 실외 마스크 제한이 전면 해제되었지만 글쎄. 학생들은 앞으로도 뭔가 괄목할 만한 사회적 바람이 불기 전까지는 학교에서 마스크를 벗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마스크는 더 이상 거추장스러운 장치가 아니다. 집 밖에선 KF94를 통과한 공기만 제 입과 코에 드나들게 하겠다는 의지가 아주 자연스럽게 자리한 것 같다. 일을 이렇게까지 되도록 직격탄을 날린 건 코로나였지만 사실 그 감염병이 아니더라도 그동안 어른들은 수많은 과오들을 저질러왔고 이 어린이들은 그 원인제공자들보다 폭탄을 더 세게 맞을 안쓰러운 세대임을 부인할 수 없다. 어린 시절에 누려야 할 것들을 이미 크게 빼앗긴 그들에게 가능한 더 좋은 것들이 주어지도록 마음을 써야 한다. 이것은 직업병이나 선한 의도까지 거론할 필요도 없이 그저 '인간'이기에 마땅한 가져야 할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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