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자락 어느 일요일 오후, 친구집에 갔다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저녁까지 먹고 나니 어느새 해가 졌다. 이 집 바로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고 여기서 버스를 타면 대략 20분 만에 우리 집 바로 앞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기 때문에 나는 9시를 마지노선으로 두고 느릿하게 시간을 더 보냈다. 그러다 시계는 8시 반을 넘어섰고 밖은 아주 깜깜해졌다. 친구는 그냥 자고 가라고 했고 나는 그러기로 했다. 블루 먼데이와의 간격을 최대한 확보하고 싶은, 주말 기분을 더 내고 싶은 나의 무의식적이고도 처절한 노력이었으리라. 물론, 나는 원래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까 내일 잠 깨자마자 집에 가서 출근 준비하면 평일 루틴에 문제없이 올라탈 수 있다는 계산이 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뒤척이다 핸드폰을 켜니 새벽 5시 반.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거나 우리 집이 아닌 곳에서 자면 잠을 설치는 사람인데 이번엔 이 둘을 동시에 맞닥뜨렸으니 잘 잤을 리는 없다. 나는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그런데 현관문이 닫히던 그 순간,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스크를 안 가지고 나온 것이다. 친구는 지금 자고 있고 나는 이 집의 비밀번호를 모른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친구에게 전화를 해봤자 어차피 자느라 안 받을 테지만 그래도 해봤다. 반응이 없었다. 버스 타고 집에 가서 여유 있게 출근 전 마음을 다독이려 했건만 마스크가 없으니 버스를 탈 수가 없다. 마스크를 안 쓴 승객을 태워줄 택시도 없다. 주변에, 그리고 이 시간에 마스크를 살 수 있는 곳도 없다. 걷다 보면 편의점이 나오겠지만 마스크 없이 들어갈 용기가 없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들어간다 한들 마스크 착용으로 인정될 리 없고 오히려 이상한 제스처로 오해만 받을 것 같다. 나는 현관문 앞에 선 채 카카오 맵으로 여기서 우리 집까지 도보 시간을 검색했다. 54분이었다. 추천 루트가 평소 차로 다니던 길과 달랐지만 대략 알만했다. 다행히 경로의 중간부터는 내가 아는 길이었고. 그래, 걸어가자. 이른 시각이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 나는 무사히 21층에서 1층까지 내려와 집을 향했다. 비 온 뒤의 습함이 대기에 가득했다. 걷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풀 냄새, 나무 냄새도 났고 티셔츠가 다 젖을 만큼 땀도 주르륵 흘렀다. 러 아침운동을 제대로 했다. 나는 예상보다 일찍 아파트 앞에 도착했고 우리 집이 2층이니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필요도 없이 계단으로 가면 됐다. 이날 나는 평소보다 빨리 출근을 했다. 이렇게 나의 노마스크 여정은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당시 다른 선택지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1시간 걷기 운동은 나에게 일상이기에 못할 것도 없었을뿐더러 오히려 그동안 실천 못했던 아침운동을 하게 된 날이었다. 전화위복이 되었달까.
그런데 잠깐. 결과는 나름 창대하였지만 시작은 어떠했었나. 미약, 아니 조마조마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국내에선 신용카드와 핸드폰만 있으면 어디든 당당히 갈 수 있는 나였는데 아까는 분명 그 세상이 막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게 웬만한 자유를 다 보장해 주었던 '돈'은 당장 입 가리개용 부직포 한 장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불어나지 않는 통장잔고에 가급적 신경 안 쓰는 것으로 정신 건강을 챙기고는 있다만 어쨌든 그 찰나만큼은 돈이 무용했다. 그것은 자차 소유 욕구도 편입되지 않은 감정이었다.
우리는 마스크가 필요한 세상에 살고 있다. 마스크 없이 집을 나서면 멈칫하게 되는 순간이 생기기 마련이라 상당수는 뇌의 영점 몇 프로 정도를 마스크 염려증에 할애하며 살아갈 것이다. 마스크 착용 의무가 진작에 전면 해제된 수많은 나라들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는 3년 째고 그 끝은 미지수다. 감염병의 확산과 마스크는 더 이상 유의미한 관계가 아니라며 이젠 맨 얼굴을 찾겠다 주장하는 누군가를 만류해야 하는 이유는, 본인의 마스크 미착용이 타인을 불쾌 또는 불안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마스크로 상징되는 너와 나 사이 장벽은 그 두께와 형질이 다를 뿐 여러모로 존재해 왔다. 적대적 경계일 때도 있지만 최선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인 가족 간에도 지켜야 선이 있는 것처럼, MBTI의 E와 I가 서로를 설득할 수 없는 것처럼 각자는 자신만의 아우라가 있고 타인은 그걸 쉬이 넘나들 수 없다. 제 판단으로 그 심리적, 물리적 간격을 섣불리 침범했다간 사회 규정 위반이든 관계의 중단이든 곤란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돈이면 다 되는 물질만능주의도 이것만은 이길 순 없다.
매일 여러 장의 한글문서를 작성하게 되는데 작업 시 여백 지정을 별도로 할 일은 거의 없다. 대개는 기본으로 세팅된 구조 속에서 작업을 하므로 왼쪽, 오른쪽, 위, 아래가 각각 몇 mm인지 알지도 못하고 궁금한 적도 없다. 그런데 얼마 전 완료한 컴퓨터 연수의 강사님은 모든 틀을 다 외우고 계셨다. '누구와는 이만큼, 여기서는 이 정도'와 같은 척도를 척척 꺼내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덜 피곤하고 덜 상처받으며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필요한 간격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 신경 쓰느라 정작 내 마음에 무지하거나 알고도 내팽겨둘 때가 많아 막상 기분 나빴던 것들을 뒤돌아보면 남이 아닌 나로부터 기인한 것들이 많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