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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삐삐 May 23. 2023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전설

당신들의 예의

 청와대가 개방을 막 시작하여 관람이 추첨제로 운영되던 어느 일요일 오전, 응모에 당첨된 나는 수많은 관람객들과 함께 의기양양하게 청와대에 입성했다. 시간대가 맞아 청와대 소속 직원의 해설도 듣고 그 후 나 혼자 차근차근 다시 돌아볼 여유도 가졌는데 주말이라 사람이 더 많았고 나는 발걸음을 더 늦추며 산책을 이어갔다. 얼마 전 문대통령이 손석희 앵커와 퇴임 전 마지막 인터뷰를 했던 침류각 앞에 다시 섰을 때였다. 최근 매스컴에서 다룬 이슈 속 바로 그 건물인 게 반가워서인지 사람들의 관심도 더 높은 듯했고 그 건물로 오르기 위한 돌계단도 사람들로 붐볐다. 나도 막 계단에 오르려고 저만치서 인파가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사람들이 예의가 없네"

초등학교 중학년쯤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의 아빠가 크게 소리쳤다. 곧이어 그 옆에 서 있던 아이가 제 아빠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는데 아이들 특유의 비아냥대는 말투와 표정이 더해져 귀에 거슬리는 강도는 더했다. 그나저나 '예의'? 여기서 예의 없는 자가 누구인가? 그들이 싸잡아 비꼬고 있는 주위 수많은 대중인가, 아니면 독사진을 찍겠다고 혼잡한 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가만 우뚝 서 있는 저 부녀인가. 내가 원하는 위치에서 사진을 남기고 싶은 사람이 어디 당신들 뿐이겠는가. 지금 이 몇 계단에서도 꽉 막힌 고속도로마냥 이렇게 서행 중인데 당신들 포즈 잡고 원하는 사진 건질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불특정다수에게 짜증을 내다니. 그가 성의 없는 '죄송합니다' 한 마디만 던졌더라도 그냥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워낙 배려 없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보니 최소한의 양심은 있다 느꼈을 테니까. 그러나 그들은 한 마디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보통 체격 성인 세 명이 나란히 서면 꽉 차는 공간 제일 윗 칸 한가운데 서서 사진을 찍었다. 그래, 사람마다 입장은 다른 것이니 한편으로 저 아빠는 아이에게 추억을 심어주고 아빠의 당당함을 보여줬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이의 교육에 대해선 무책임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공공장소에서의 예절을 학교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이게 학교 안팎에서 실천되지 않는 건 사실 당연한 귀결이다. 학교교육은 가정교육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키즈존이 확대되고 소아과가 없어지고 교사 만족도가 바닥인 것은 비단 그들의 집단이기주의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다음날인 월요일에 당장 학생들과 이 일을 토의했다. 선생님이 어제 이런 일을 목격했는데 너희들은 예의가 뭐라고 생각하니? 내 앞에 있는 3학년 아이들의 상식과 경험은 나와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나보다 더 격분하는 듯한 그들의 반응이 나를 안도케 했다.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점심 피크시간이 지나 혼자 동네 식당에 갔는데 유명한 집이라 사람은 많았다. 주방에 남자 두 분, 카운터에 여자 한 분, 서빙은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성이 했다. 홀이 그렇게 크진 않지만 서빙 직원이 혼자라 남성은 분주했다. 주문 후 음식을 기다리는데 제일 안쪽 테이블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이런 싸가지 없는 자식이"

 70대는 족히 넘어 뵈는 할아버지 세 분의 테이블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히 그쪽을 향했지만 아무도 그 상황에 말을 더하지 않았고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원래 본인이 하던 일을 했다. 먹던 음식을 먹었고 하던 이야기를 했다. 원래도 고요한 분위기가 아니었고 감자탕집이라 술도 팔았다. 그래도 여긴 고성방가가 어울리는 분위기도 아니고 지금은 술에 취해있을 밤도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나온 쌍욕은 사람들의 귀에 꽂힐만했다. 욕은 서빙직원을 향한 것이었고 상대방은 대꾸가 없었다. 무슨 사연일까 궁금하긴 했지만 곧 내 음식이 나왔고 나는 내 허기를 채우기도 바빴다. 남직원은 홀을 가로지르며 계속 바빴고 내 음식은 카운터의 여자분이 가져다주었다. 내 자리는 카운터 바로 옆이었다. 카운터와 내 테이블 사이에는 밥집에 보통 하나쯤 있는 무료커피머신이었다. 구석의 테이블에서 할아버지들이 일어나셨고 계산대 앞으로 오셨다. 그리고 점잖게 말씀하셨다.

 "내가 여기 자주 오는데 말입니다. 커피 좀 갖다 주라는데 흘깃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그냥 가더라고요. '지금 바쁘니까 못합니다'라든지 뭐라 대꾸를 한 것도 아니고 옆으로 쳐다보고 가버립디다"

 "못 들었나 봐요. 이해해 주세요^^"

 나는 그 대학생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가. 알바에게 커피심부름이라니. 그리고 저 친구는 우리나라에서 뭣만 하면 언급되는 그 'MZ'인데. 이런 '불의'를 못 참는 친구였다면 글쎄, 과연 그렇게 무대응으로 조용히 끝냈을까.


  예의와 호의는 다르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불찰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혐오가 판치는 시대. 불필요한 혐오를 조장하는 당신들이 시대의 어둠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침 드라마를 욕할 필요도 없이 각자 엄청난 현실을 살아내고 있다.

 저녁에 대학로를 지나다 어떤 공연장 앞에 줄이 끝없이 늘어서 있길래 그중 멀뚱히 앞을 보고 있던 한 젊은 여성에게 다가가 "저기, 이거 무슨 줄이에요?"하고 물었는데 그녀는 들을 척도 안 하고 본인 핸드폰만 쳐다봤다. 살면서 그렇게 대놓고 없는 사람 취급 당한 건 처음이었다. 한 마디면 될 텐데 그 대답이 그렇게 귀찮았던 걸까. 누가 어렵게 셀카를 찍고 있다면 "사진 찍어드릴까요?"하고 먼저 물어봐주고 누군가 도움을 요청하면 특별히 선한 마음까지도 필요 없이 그냥 자동으로 "네"하며 몸이 반응하는 게 그동안의 삶 아니었던가. 나는 매우 무안했지만 빨리 무덤덤해지려 애썼다. 그녀에겐 내게 친절을 베풀어줄 의무가 없으며 나는 아직도 세상을 너무 아름답게 보는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므로 이렇게 또 경험치를 쌓아가는 것이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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