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은 헉헉대는 나를 보았다
십 킬로미터가 목표인 러너,
허나 고작 오백 미터를 지나던 중인 나를
일과를 마친 나는 도파민을 구하고자 뛰었고
욕심이 기승을 부린 나머지
숨이 갈길을 잃어 점점 가빠질 때까지
속도는 멈추지 않았다
때마침 녀석은 기죽음이란 찾아볼 수 없이
고개는 빳빳이 허리는 말쑥하게
우아하게도 걸었다
옆을 힐끔 쳐다봤을 뿐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계속 제 갈 길을 갔다
천변 다리 아래의 한 뼘 난간은
이렇게 제 주인을 천명했다
여긴 누구의 영역인가
차지하고 정복할 필요가 없었다
공존구역은 반드시 존재하며
현재에 도도한 자가 승자인 바
녀석의 걸음은 누구보다 여유로웠다
최소한 나보다는 더
나는 숨을 고르려 애썼다
아직 구 킬로 몇 미터가 남아있고
내 몫으로 남겨진 공유의 것들을 즐겨야 했기에
나는 다리 밑을 슬슬 지났고
녀석은 홀연 사라졌다
그렇게 우리 둘은 연기처럼 스쳐갔다
녀석은 세상을 가진 자였다
그저 발붙일 곳 없는 이놈의 현실을 초월한 자태였대도
몸놀림만은 훌륭했으니 알게 뭔가
그때 내 표정은 무슨 말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이내 뜀박질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걸었다
한 번 놓친 페이스는 우회로를 필요로 했으나
되돌리기에 오늘은 역부족이었다
심장은 리듬을 찾았고
힘이 들어간 입꼬리는 위를 향하고 있었다
듬직하지도 멋지지도 않은 미물과의 만남은 그렇게 뇌리에 박혀
나를 다시 한번 홀로 우뚝 서게 했다
사뿐히 나아가는 당당한 이너피스여
오늘밤도 어느 후미진 곳에 웅크리며 자게 될,
그러나 내일이면 다시 피어날
녀석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