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부인 / 어느 개인 날, un bel di vedramo>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고 하지요. 어디 자식뿐이겠습니까? 나와 인연을 맺은 것들이라면 괜스레 정이 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아티스트들에게 ‘가장 아끼는 작품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 만큼 어리석은 질문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왔는데요.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가수 이소라 씨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곡으로 ‘바람이 분다’를 꼽았습니다. 또 60년 가수 인생의 하춘화 씨는 가장 아끼는 곡으로 ‘물새 한 마리’를 꼽았고요. 나름의 사연이야 있겠습니다만 특정 작품을 공식적으로 가장 아낀다고 밝히는 건 대단한 애정과 동시에 용기가 필요할 것 같아요.
작곡가 푸치니가 자신이 만든 수많은 오페라 작품의 여주인공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로 <나비부인>의 ‘초초상’을 꼽는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이야깁니다. <나비부인>의 아름다운 아리아는 대부분 초초상의 독창이거나 이중창이어서 이 역을 맡은 소프라노는 공연 내내 쉴 새 없이 노래를 해야 하죠. 또 푸치니가 구입한 거액의 요트에도 ‘초초호’라는 이름을 붙였을 정도로 작품에 대한 그리고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고 하네요.
<나비부인>은 좋은 가문의 영애였다 집안의 몰락으로 게이샤가 된 소녀, 초초의 이야기를 담은 오페라 작품인데요. ‘쵸’는 일본어로 ‘나비’라는 뜻입니다. 남자 주인공은 일본에 주둔한 미 해군 대위 ‘핀커톤', 이름보다는 그저 나쁜 남자로 기억될 인물이죠. 1막의 배경은 나가사키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일본식 집입니다. 당시에는 타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함께 살림을 차리는 현지처가 있었죠. 핀커톤은 중매쟁이의 소개로 초초상을 만나 현지처로 삼으려 합니다. 하지만 초초상이 자신은 원래 귀족 가문 출신이라 결혼하지 않은 채 남자와 같이 살 수는 없다고 하여 결혼식을 올리게 되는데요. ‘모든 나라의 꽃과 미인을 자신의 보물로 삼지 않으면 인생에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고 노래하는 핀커톤의 아리아를 들어보면, 핀커톤은 처음부터 초초상과의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겠죠?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식을 올린 핀커톤과 초초상은 달달한 노래를 부르며 행복을 꿈꿉니다. 하지만 이 분위기는 얼마 가지 못해요.
1막이 끝나고 2막은 3년이 지난 후의 이야기입니다. 핀커톤은 초초상과 결혼하고 얼마 안 지나 미국으로 돌아가 3년째 소식이 끊긴 상황, 초초상은 나가사키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집에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요. 생활비마저 빠듯해지고, 하녀인 스즈키는 많은 현지처들이 이런 식으로 버림받는다며 걱정을 하지만 초초상은 그럴 리 없다며 핀커톤이 반드시 돌아올 거라 믿고 있어요. <나비부인>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이자 푸치니가 가장 아꼈다는 곡입니다.
Un bel dì, vedremolevarsi un fil di fumo
dall'estremo confin del mare
E poi la nave appare.Poi la nave bianca
entra nel porto, romba il suo saluto
Vedi? Èvenuto!
Io non gli scendo incontro. Io no
Mi metto làsul ciglio del colle e aspetto
e aspetto gran tempo e non mi pesa
la lunga attesa
E uscito dalla folla cittadina
un uomo, un picciol punto
s'avvia per la collina.Chi sarà? chi sarà?
E come saràgiunto che dirà? che dirà?
ChiameràButterfly dalla lontana
Io snza dar rispostame ne starònascosta
un po' per celia......
e un po' per non morire al primo incontro
ed egli alquanto in pena chiamerà
chiamerà: iccina mogliettina olezzo di verbena
i nomi che mi dava al suo venire
어느 맑게 개인 날지 푸른 바다 위에 떠 오르는
한 줄기의 연기 바라보게 될 거야.
하얀 빛깔의 배가 항구에 닿고 예포를 울릴 때
봐! 그이가 오잖아.
그러나 난 그곳에 가지 않아
난 작은 동산에 올라가서
그이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이와 만날 때까지
복잡한 시가지를 한참 떠나
한 남자 오는 것을 멀치감치 바라보리라.
누구지? 그가 누굴까?
산 언덕 위에 오면 뭐라고 하지? 뭐라고 말할까?
멀리서 버터플라이 하고 부르겠지.
난 대답하지 않고 숨어 버릴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기뻐서 내가 죽을 것 같아
한참 동안을 그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내 어린 아내라고, 오렌지 꽃이라고,
늘 부르던 그 이름을 부르리라
이토록 슬플 수가 있을까요. 사실, 핀커톤은 초초상을 돌봐주고 있는 자신의 친구 샤플레스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3년이나 지났으니 그녀도 나를 잊었을 것이다.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도록 잘 타일러달라’ 라고요. 샤플레스는 초초상에게 차마 이 편지를 전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이를 낳아 혼자 키우고 있는 초초상에게 어떻게 그 소식을 전하겠어요. 근무상 타지에 머무는 동안 사랑했던 여인을 두고 고국으로 돌아간 남자를 그저 ‘나쁜 남자’로 치부하는 것이 억울할 수도 있겠으나 문제는 다시 돌아올 때의 모습입니다. 이별을 고하든, 다시 사랑을 하든 혼자 올 것이지 고국에서 만나 결혼을 앞둔 여자와 함께 오는 것은 너무 잔인한 행동이니까요. 게다가 자신이 떠난 후에 초초상 혼자서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아들만 데리고 돌아가려 하다니...... 이쯤이면 나쁜 남자라 해도 할 말은 없죠. 오페라는 비극으로 끝이 납니다. 초초상의 마지막 외침에 숨 죽을 만큼의 긴장감으로 막이 내려요. 너무나 아픈 결말입니다.
푸치니가 이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 그의 작품에도 반영했다는 것은 여러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그는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서부의 아가씨>,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투란도트>,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나비부인> 등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나비부인> 결말을 통해 당시 유럽 사람들이 동양의 여성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죠.
앞에 소개한 ‘un bel di vedramo(어느 개인 날)’은 김승옥 소설의 <무진기행>에서도 등장합니다.
무진에 온 날,'나'는
중학교 선생인 후배 '박'과 세무서장으로 있는 동창생 '조'를 만난다.
그리고 '조'의 집에서 '하인숙'이라는 음악 선생을 소개받게 된다.
대학시절 전공이 성악이었고 졸업연주회 때 <나비부인> 중 <어떤 개인 날>을 불렀다는 그녀는
'조'의 성화에 못 이겨 그 자리에서 노래를 한 곡 부르게 된다.
여선생은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조금만 달싹거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세무서 직원들이 손가락으로 술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선생은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있었다.
<어떤 개인 날>과 <목포의 눈물>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유사성이 있을까?
무엇이 저 아리아들로써 길들여진 성대에서 유행가를 나오게 하고 있을까?
그 여자가 부르는 <목포의 눈물>에는
작부(酌婦)들이 부르는 그것에서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꺾임이 없었고
대체로 유행가를 살려주는 목소리의 갈라짐이 없었고,
흔히 유행가가 내용으로 하는 청승맞음이 없었다.
그 여자의 <목포의 눈물>은 이미 유행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비부인> 중의 아리아는 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어떤 새로운 양식의 노래였다.
그 양식은 유행가가 내용으로 하는 청승맞음과는 다른
좀 더 무자비한 청승맞음을 포함하고 있었고
<어떤 개인 날>의 그 절규보다도 훨씬 높은 옥타브의 절규를 포함하고 있었고,
그 양식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狂女)의 냉소가 스며 있었고,
무엇보다도 시체가 썩어 가는 듯한 무진의 그 냄새가 스며 있었다.
(김승옥,「무진기행」)
아직까지 <나비부인>의 아리아 ‘un bel di vedramo(어느 개인 날)’와 김승옥 소설 <무진기행> 속에 나오는 ‘목포의 눈물’. 이 두 곡의 연관성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무진기행>을 읽은 후부터는 항상 두 곡이 함께 떠오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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