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우리에게 다가온 노란 봉지
“안녕하세요?” 불쑥 노란 봉지가 나타나 인사합니다. 좁은 길을 쏙쏙 지나고,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가로지르며 긴 여행 중인 노란 봉지. 때로는 비바람과 흙탕물에 지치기도 하지만 우연히 만나 건넨 위로는 우리를 미소 짓게 하지요. “힘을 내요” 속삭이며 바람을 가득 품고 다시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나는 봉지
노인경 글·그림 / 72쪽 / 12,000원 / 웅진주니어
여자아이가 엄마와 함께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구멍 난 노란 봉지 사이로 대파 머리가 쏘옥~, 여자아이는 그걸 보고 깔깔 웃고 이야기하고 춤을 춥니다. 물건 정리를 끝낸 엄마는 봉지를 커다란 재활용 봉지 안에 넣습니다. 돌돌 말린 봉지들 사이에서 노란 봉지는 창밖을 봅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가만히 있기엔 세상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때 바람의 노래가 들려옵니다. 노란 봉지는 바람을 가득 담아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세상을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난 노란 봉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득 담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여자아이는 노란 봉지를 반갑게 맞아 주고 상처 난 곳을 치료해줍니다. 노란 봉지는 작은 빛이 되어 아이의 방을 밝힙니다.
한번 쓰고 아무렇지 않게 휙~ 하고 버려지는 봉지를 보고 문뜩 생각했습니다. ‘봉지의 삶은 여기가 끝일까? 억울하겠다.’ 그러고 나서 봉지를 쓰고 버릴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쓸모없다며 버려지고 잊혀지는 것들의 삶이 떠올랐습니다. 함부로 취급받고, 무시당하고, 가치 없다고 치부되는 삶. 봉지와 참 닮았습니다.
이탈리아에 여행 갔을 때 일입니다. 장을 보고 나오는데 봉지가 너무 얇아 집에 가기 전에 뜯어질까 걱정했습니다. 알아보니 이탈리아는 마트에서 백 퍼센트 생분해성 봉지 사용이 의무화되어 있었습니다. 먹어도 되는 봉지, 썩는 봉지, 땅에 묻혀 녹고 스며들어 흙이 되고 꽃이 되는 봉지를 그려보았습니다. 꿈을 꾸는 봉지를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나게 그림 작업을 하던 어느 날, 남편이 한마디 했습니다. “일회용 비닐봉지라는 소재가 지닌 부정적인 면이 너무 큰 거 아니야? 그걸 먹고 죽은 물고기나 버려진 봉지 더미들을 봐.” 그러자 봉지를 계속 그려야 할지 고민되었습니다. 그때 이 책의 디자이너가 “이 세상에 버려지지 않는 물건이 어디 있을까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말해주어 제 고민이 조금 덜어졌습니다. 작업 중간에 일회용 봉지 입장에서 자기 소개서를 써보기도 했습니다. 봉지의 이야기를 꼭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고, 다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한 번 사용되고 버려지는 물건들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림책을 만들 때는 주제를 명확히 정하고 그에 맞는 그림 스타일과 형식 등을 정교하게 계산해 작업했습니다. 그것이 나만의 작업 방식이라 생각했는데, 조금씩 한계가 보였습니다. 한 곳을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 뻔한 전개, 독자에게 강요하는 듯한 주제 전달 방식. 또다시 도전하고 변해야 하는 순간임을 느꼈습니다. ‘이번엔 어디로 갈지 정하지 말고 나를 던져보자! 봉지를 따라 자유롭게 날아보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너무 열심히 하지 말자!’고 결심했습니다. 구체적인 밑그림 없이 손톱 스케치 후 바로 그리기를 했습니다. 세상을 날아다니며 자유롭게 여행하는 노란 봉지가 되어 그림을 그려보기로 했습니다.
붓이 지나간 흔적이 겹겹이 쌓여 투명하고 맑은 느낌을 담을 수 있는 종이를 고르고 12색 수채화 물감과 3색 색연필로 작업했습니다. 사람들의 움직임, 표정, 날씨, 공기를 그렸습니다. 짙어지는 녹음,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설레는 사람들, 혼자 또는 함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끔 제 그림이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때가 있어 글이 들어가면 내용이 가벼워지고 상상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게 글쓰기는 참 어렵습니다. 일단 최대한 구구절절 구체적으로 글을 넣고 빼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글 없이 책을 펼치면 음악이 흐르는 구성을 혼자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붓놀림 한번의 실수로 다시 그리기를 반복했지만, 어떤 그림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는 건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었고 살아 있는 그림 그리기가 가능했습니다. 아이를 재우고 밤이 되면 그림을 그렸는데, 몇 달이 지나니 200컷이 넘는 그림이 쌓였습니다. 편집자, 디자이너와 함께 흐름을 잡고 순서를 정한 뒤 몇몇 장의 그림을 다시 그렸습니다. 다른 책 작업의 몇 배가 되는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작업이 마무리되는 순간까지 지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기쁘게 하는 것 말고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는 많지 않다”라는 프랑스 그림책작가 뱅자맹 쇼의 말처럼, 이 책이 고맙고 소중했습니다.
『나는 봉지』는 ‘시선을 마주하는’ ‘다가가는’ ‘귀 기울이는’ ‘함께하는’ 순간들을 담은 책입니다. 노란 봉지는 제가 살아가는 동네의 골목길, 경의선 철길, 동진시장 사이를 굽이굽이 날고 있습니다. 제게 다가와 인사합니다. “안녕!” 노랗고 따스한 봉지가 전하는 행복과 자유를 독자들과 함께 느끼고 싶습니다.
노인경 작가는 홍익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이탈리아에서 순수미술을 공부했어요. 엉뚱한 공상부터 무겁고 진지한 사색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며 탄생시킨 책으로 『나는 봉지』 『곰씨의 의자』 『고슴도치 엑스』 『코끼리 아저씨와 100개의 물방울』 등이 있어요. ‘2012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되는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상을 받으며 주목받는 그림책작가입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7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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