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지켜준 벗

나를 찾아가는 그림책 여행 5

by 행복한독서

꿈은 아이들이나 품고 있는 단어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어른들이야말로 꿈이 필요하다. 지금 하는 일을 더 잘하려 발전하는 것은 꿈이라고 하기 어렵다. 잘하지 못해서 피해왔던 일에서도 노력해보는 것, 나와 다른 가치들을 받아들이며 넓어지려 애쓰는 것, 불가능의 세계 한 조각을 언제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 이런 일들은 사람을 살아있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꿈을 하나씩 밝힐 때마다 내 곁에는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때로는 롤모델로 삼고픈 어른, 기업의 대표, 친한 언니, 다정한 지인들이 나의 길벗이 되어주었다.


이세 히데코의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청어람미디어)『커다란 나무 같은 사람』(청어람미디어)은 좋은 어른과의 만남이 한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에서 아끼는 식물도감이 다 뜯어진 소피는 책을 고쳐주는 를리외르를 찾아간다. 아저씨와 소피의 대화는 묘하게 어긋나있지만, 완성된 도감을 보면 아저씨가 소피의 말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커다란 나무 같은 사람』에서 다시 만난 소피는 다시는 뜯어지지 않는 식물도감을 품은 채 식물 연구자가 되어있다. 소피가 꿈을 간직한 채 성장한 데에는, 아이의 보물을 소중하게 다뤄준 따스함과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를리외르 아저씨의 태도가 영향을 미쳤음이 자명하다.


『커다란 나무 같은 사람』의 사에라 역시 식물학자와의 만남을 통해 세상으로 한 발자국 나와 소통하게 된다. 식물학자는 사에라에게 다양한 식물의 생태를 들려주고 씨앗을 선물하고 아이를 식물원의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사에라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는 상상에 맡겨야겠지만, 아이가 새로운 뿌리를 내리는 데에 식물원에서 보낸 한 철은 분명 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우리 각자는 사회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조용히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고 보면 좋은 사람과의 만남은, 그와 헤어지고 나서도 오래도록 영향을 미친다. 『토토와 오토바이』(북극곰)의 토토는 매일 밤길 떠나는 꿈을 꾸지만 한 번도 밀밭을 떠나본 적이 없다. 가끔 슈슈 할아버지가 찾아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만났던 온갖 아름다움에 대해 들려준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토토에게 자신의 오랜 친구인 오토바이를 남겨준다. 하지만 몇 번의 계절이 흘러가도록 토토는 길 위에 오르지 못하고 망설인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오토바이에 오른 토토는 몇 번이고 먼 곳으로 떠나갔다가 언제나 다시 밀밭으로 돌아온다. 꼬마 친구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가득 싣고.

토토와오토바이.jpg ⓒ북극곰(『토토와 오토바이』)

할아버지가 토토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토토는 마치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 같다. 그림 속에서 토토는 할아버지 뒤에 탄 채 바람을 만끽한다. 그리고 진짜 오토바이 여행을 떠날 때 토토는 또다시 할아버지의 존재를 느낀다. 이때는 할아버지가 토토의 뒤에 타고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성장을 지켜봐주는 시절의 감동. 좋은 벗과의 만남은 바로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뭉근하게 달아오르다 한순간 끓는점을 넘도록 도와준다.


꿈과 성장을 지지해주는 존재가 꼭 어른일 필요는 없다. 『언니와 동생』(북뱅크)은 어린 자매가 서로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그림책이다. 무엇이든 베풀어주고 일러주는 든든한 언니의 이면에는 책임감과 동시에 분명한 우월감이 있다. 너는 내가 돌봐 줘야 하는 존재, 나는 너를 돌볼 수 있는 존재라는 우월감. 언니가 주는 사랑에는 애정이 있지만, 동시에 통제와 권위가 엿보인다. 그렇기에 이 사랑은 동생의 입장에서는 구속이 될 수 있다.

언니 뜻 대신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보고 싶던 동생은 결국 언니 몰래 집을 나선다. 데이지꽃 사이에 누워 동생은 언니를 떠올리는 동시에 자신의 몸으로 직접 세상을 감각하기 시작한다. 햇볕을 느끼고, 벌의 소리를 듣고…. 그러나 그런 성장의 순간은 결코 쉽지 않다. 사랑하는 상대와 떨어지겠다는 결심도, 한 발자국을 떼는 것도, 떨어진 거리를 견디고 감당하는 것도 모두 다. 맨살이 풀잎에 쓸리는 고통을 조용히 견디면서, 동생은 받기만 하는 약하고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돌려줄 수 있는 한층 성숙한 존재가 된다.

언니와 동생.jpg ⓒ북뱅크(『언니와 동생』)

동생을 잃어버린 줄 알고 엉엉 우는 언니에게 다가가 언니가 가르쳐준 대로 눈물을 닦아주는 아이. 이때 동생의 사랑은 권위나 의무가 섞인 사랑과는 다른, 그야말로 자발적이고 다정한 사랑이다. 언니는 동생을 통해 받을 줄 아는 사람으로 넓어지고, 동생은 또한 언니를 통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커진다. 이제 두 사람은 앞으로도 오랜 기간에 걸쳐 서로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지지하고 도와주고 싸우고 화해하고 주고받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껏 살펴보았던 그림책의 대부분에서, 주인공 곁에는 늘 시동을 걸어주거나 함께 길을 떠나는 조력자가 있었다. 『오리건의 여행』(미래아이)은 오리건과 듀크 두 명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여행이다. 『아저씨 우산』(비룡소)에서 아저씨가 우산을 펼 수 있었던 건 아이들의 노랫소리 덕분이었다. 『조랑말과 나』(이야기꽃)에서 내가 계속 걸어갈 수 있었던 건, 내 곁에 지치지 않는 조랑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실재하는 사람이든 내면에 머무는 또 다른 자아이든, 혼자만의 힘으로 겨울을 건너갈 수 없을 때 봄바람을 불러일으켜 줄 타자의 목소리는 절실하게 필요하다. 너로 인해 나에게 불어온 봄바람은, 나를 타고 또 다른 이에게로 흘러가 봄을 부른다. 벗이라는 이름으로.


황유진_작가, 『어른의 그림책』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0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작가의 이전글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