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이 이어준 끈

나를 찾아가는 그림책 여행 6

by 행복한독서

‘끈’은 여러 은유를 담고 있어 무척 좋아하는 단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은 인연, 길게 이어지는 인생, 먼먼 과거로부터 살아남은 기억, 끊일 듯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할머니의 이야기, 포근한 담요로 재탄생할 사랑. 서로 다른 것들을 이어주는 모든 것들을 끈으로 은유할 수도 있겠다. 인연도 인생도 기억도 이야기도 사랑도 혼자 할 수 없다. 다양한 벗과 함께할 때 가능하다. 그러니 나에게서 출발한 이야기의 끈이 너로, 세계로 확장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최향랑 작가의 『숲 속 재봉사와 털뭉치 괴물』(창비)은 ‘숲 속 재봉사 3부작 시리즈’ 중 두 번째 그림책이다. 최향랑 작가는 말린 꽃잎, 잎사귀, 돌멩이 등 자연물을 활용해 그림책 작업을 한다. 이 책에서는 이야기에 걸맞게 털실이라는 재료를 활용해 펠트 공예와 뜨개질 작품을 선보였다. 숲속 재봉사는 숲속 친구들에게 꼭 필요한 옷을 만들어주는 다정한 친구다. 어느 날 커다란 털뭉치 괴물이 찾아와 옷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지만, 재봉사와 동물 친구들은 두려워하기는커녕 괴물을 떠밀어 목욕을 시킨다.


커다랗고 지저분하고 무섭게만 보이던 털뭉치 괴물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 아주 작고 여린 강아지 쿵쿵이었다. 사랑받지 못해 여기저기 떠도는 동안 자란 털에 삼켜져버린,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살아남으려고 먼저 으르렁대는 법을 배워버린 강아지. 재봉사와 친구들은 강아지가 벗어던진 털뭉치를 실타래로 곱게 변모시켜 서로를 위한 옷을 지어준다. 뜨개옷을 입고 실컷 눈 장난을 한 숲속 친구들은 포근한 낮잠에 빠진다.


숲속 재봉사와 털뭉치 괴물.jpg ⓒ창비(『숲 속 재봉사와 털뭉치 괴물』)


하지만 마음이 벅차게 끓어오른 쿵쿵이는 뜨개질을 멈출 수 없다. 쿵쿵이는 이제 누구를 위한 옷을 짓게 될까.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고 상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찾아준 친구들의 따뜻한 마음 그리고 받은 사랑을 다른 이에게 전할 줄 아는 넉넉한 사랑의 끈이 독자의 마음도 따뜻하게 엮어주는 작품이다. 삶에서 나를 발견해주는 사람이 한둘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을까, 혹은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인 채 살아가는가. 읽고 나면 사랑과 질문이 마음속에 한껏 차오른다.


끈이 등장하는 그림책이라면 『애너벨과 신기한 털실』(길벗어린이)을 빼놓을 수 없다. 춥고 온통 눈과 검댕뿐인 마을에 사는 애너벨. 어느 날 애너벨은 갖가지 색깔의 털실이 들어있는 조그만 상자를 발견한다. 자신의 스웨터를 한 벌 뜨고 강아지 마스에게 떠주었는데도 털실이 여전히 남아있다. 친구에게 놀림당하고 선생님에게 혼나도 애너벨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친구들과 선생님, 가족과 마을 사람들, 동물들 나아가 트럭과 집 같은 무생물에까지 스웨터를 떠준다. 털실은? 여전히 남아있다.

애너벨의 신기한 털실.jpg ⓒ길벗어린이(『애너벨과 신기한 털실』)


줄지 않는 실에 대한 소문은 바다 건너 먼먼 곳까지 퍼진다. 애너벨의 작품에 감탄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어느 날 먼 나라에서 찾아온 귀족이 10억 원을 줄 테니 털실 상자를 팔라고 한다. 얼마를 주어도 팔지 않겠다는 애너벨에게 화가 난 귀족은 돈으로 도둑을 매수해 상자를 훔친다. 마침내 열어본 상자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있었을까? 귀족의 저주대로 애너벨은 평생 행복하지 못했을까? 뜨고 또 떠도 사라지지 않는 털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애너벨이 상자를 팔지 않은 이유는 값을 매길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털실은 아마 사랑이고 예술이고 상상력이었겠지. 그것의 진심을 아는 사람에게는 천금 같은 것이고, 효용에만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값어치가 없는 것이다. 사랑과 예술의 힘을 빌려 만들어진 스웨터는 사람과 사람 사이, 동물과 동물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를 이어준다. 추운 겨울 속에서 온기가 피어나고 흑백의 풍경 속에서 색이 살아난다. 그리고 모두 개별자였던 존재들은 ‘우리’로 이어진다. 사랑할 줄 아는, 예술을 아낄 줄 아는 당신이 있어 오늘 세상에 하나 더 예쁜 색이 스며들었다고 애너벨에게 말해주고 싶다.


세계로 멀리 뻗어나갔던 실을 다시 끌어당겨 본다. 『애너벨과 신기한 털실』의 마지막 장면에서 귀족에게 빼앗겼던 털실은 다시 애너벨에게 돌아온다. 귀족의 저주와 상관없이 애너벨은 행복하다. 여전히 사랑하고 여전히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렇게 나에게서 시작된 행복은 멀리멀리 번진 다음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행복의 첫 출발은 역시 내 안의 많은 ‘나’를 잘 이어보는 것 아닐까. 어린 나와 어른이 된 나, 하고 싶은 나와 하기 싫은 나, 기쁜 나와 슬픈 나, 사람들에게 잘 보여주는 나와 숨기고 싶은 나.


붉은 털실이 짧았다 길었다 구불거렸다 펴졌다 하며 희로애락을 아름답게 표현해낸 『나는 기다립니다…』(문학동네)를 마지막으로 꺼내어본다. 인생의 중요한 매 순간은 ‘끝이 아니라 끈’이 된다는 믿음. 여러 모습의 나를 인정하고 다독일 때, 우리는 확장되어 세상의 너른 이야기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빛-밤-벽-꿈-벗.

5회에 걸친 앞선 글 여정은 수많은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 위한 길이 되기를 바랐다. 나에게서 시작되어 당신과 나로 연결된 이야기의 끈이, 세상과 사람을 연결하는 길고 아름다운 끈으로 자라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여정에 언제나 직관적이고 아름답고 슬프고 재미있는 색색의 그림책이 함께했으면 좋겠다. 내 이야기를 발견하는 길 위에서 그림책은 언제나 함께 웃고 우는 벗이 되어줄 테니까.


황유진_작가, 『어른의 그림책』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0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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