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감싸고 싶은 작가

작업실에서 만난 젊은 작가 8 - 명수정

by 행복한독서
명수정작가(ⓒ김지원).jpg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리아와 1번부터 4번까지를 수없이 반복하며 듣고 있다. 눈을 뜨기도 하고 감기도 하고 멍한 채로 반복해 듣는다. 연주자에 따라서도 느낌이 다르지만, 소리로만 들을 때와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듣는 것 또한 다르다. 그러나 들을수록 마음 한편이 슬프다. 「2단의 손 건반을 가진 쳄발로를 위한 아리아와 여러 개의 변주곡」이라는 원제가 있지만 창작 배경에 얽힌 일화 때문에 나중에 붙여진 부제로 더 알려진 이 곡. 작가는 왜 이 연주곡을 QR코드에 담았을까. 『피아노 소리가 보여요』를 보면서 빠져든 생각이다. 항상 눈을 뜨고서 보고 듣는 것에 익숙한 사람에게 ‘소리가 보인다’는 건 낯설고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이다. 시력과 청력을 잃은 사람에게 바치는 그림책은 이렇게 헌사 되었다. 시각, 청각, 촉각으로 느낄 수 있게 이미지화한 이 역작은 그러기에 특별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작가의 고민이 배어난다. 마치 큰비 오기 직전의 햇빛이 차단된 먹구름색 바탕 위에 피아노가 놓이고, 그 주변으로 형형색색의 물방울들이 피어오르는 듯한 어둠의 공간, 이 공간감을 넓히려고 책은 오른쪽에서 왼편이 아닌 아래에서 위로 넘기는 방식을 택한다. 공중을 떠도는 타원체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면 약간은 거칠거칠한 촉감이 느껴진다. 이 느낌으로 글 대신 소리를 보고 듣는 어둠의 세계를 여행해야 한다.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QR코드에 접속해 듣게 된다.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작가는 밤마다 잡히지 않는 소리를 찾아 어둠 속을 하염없이 떠돌았을지 모른다.


피아노소리가보여요.jpg ⓒ글로연(『피아노 소리가 보여요』)


낮에는 화실에서 그림 수업을 하면서 사는 일에 열중하고, 사람들이 잠든 새벽녘에는 고단함을 이 작업으로 기대었을 것 같다. 어쩌면 가장 절박한 시간이면서 그림 그리는 이의 마지막 자존감을 지키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힘들지만 긴 여정을 가는 그를 따라 그림책 여행을 가는 독자들도 하나둘 늘어간다.


자연과 가까이 있었던 어린 시절, 겨울이면 눈이 오는 곳을 찾아 가족과 함께 여행했다. 그것도 아주 큰눈이 오는 곳을 일부러 찾아서. 그때의 아버지는 눈도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 보인다고 했다. 5세 때, 10세 때 또는 그 이후에 보고 느끼는 눈이 다르다는 거였다. 경상남도 창녕에서 살았던 유년 시절의 기억은 특별히 남다르다. 수의사로 일하면서 낚시를 여가로 삼던 아버지는 삼 남매를 데리고 휴일이면 물을 찾아 숱하게 다녔다. 어떤 때는 안동댐에서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 밤을 새우기도 했다.


가족들과의 추억은 지금에 와서야 아련히 떠오르지만 내면에 쌓인 건 고스란히 남을 터였다. 창녕에서 위쪽으로 1시간 거리였던 대구에서의 초등학교. 이후 줄곧 서울에서 생활해온 그에게서 지난날의 감성을 짐작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부모님의 평범하면서도 남다른 배려는 전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억지로 뭔가를 시키지 않으셨고 자식 셋 모두에게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를 거의 주지 않았다. 그저 엇나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소박한 삶의 방식. 지금 부모들 교육에 비하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가정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그림 그리는 것도 조용히 응원해주었다. 스스로 선택한 길에 대해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멀찌감치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켜보았다. 이는 스스로 자신을 이겨내는 데 힘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예능계 고교에 한 번 떨어졌을 때 방황의 시간 동안 화실을 그만두기도 했는데 1년이 지난 후 그림이 다시 그리고 싶어졌다. 슬럼프는 소리 없이 고통스럽게 찾아오지만 그럴 때도 스스로 출구를 찾아야 했다. 결국 그림은 이처럼 산을 넘고 혼자서 길을 가야만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가 사회에서 선택한 건 일러스트레이터였다. 전집, 표지, 캘린더, 포스터 등 주문하는 모든 것을 의뢰받는 일이 이어졌다. 그런데 여기에는 직업으로 하는 것과 자기 정체성의 한계가 분명함을 시간이 지날수록 겪어야만 했다. 처음 가졌던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꿈은 의뢰인의 요구로 번번이 무너져갔다. 책을 좋아했기 때문에 화가에서 일러스트레이터를 선택했던 동기가 되었고 뭐든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제 분명히 그의 길은 그림책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화실을 운영하면서 아이들과 부모들을 대하며 그림책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두 번째 작품 『세상 끝까지 펼쳐지는 치마』를 작업하면서 가능성을 열어보았다.


보는 이들이 흥미롭게 볼 수 있게 되도록 친절한 그림책이기를 바랐다. 이 책에서의 그림은 아주 섬세하게 보아야 한다. 책을 열면 한 여자아이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다 이내 꽃들이 우거진 숲으로 걸어가며 묻는다. “이 치마 하늘 끝까지 펼쳐져?” 다섯 살 조카의 치마를 입혀주다가 받은 조카의 질문에서 시작된 그림과 이야기는 치마가 하늘 끝까지, 세상 끝까지 펼쳐지기를 원했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여성과 남성의 균형 잡힌 이야기를 끌어내려는 시도였다.


책장을 넘기면서 그림 안에는 바리공주, 헤르미온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뮬란, 빨강머리 앤, 도로시, 말괄량이 삐삐 등 스물넷의 고전 캐릭터들이 곳곳에 숨은그림찾기처럼 등장한다. 거의 모두 작품 속에서 ‘여자’아이가 당당한 주체로서의 주인공들이다. 오일 파스텔, 색연필, 수채 물감을 사용해 모든 지면의 분위기를 빨간색 톤으로 가져간 장면들은 스케치 수정 기간도 무척 길었지만 채색에만 넉 달이 걸릴 정도로 치밀함의 극치를 보인다. 이 그림들이 보여주는 젠더의 상징성 때문인지 여러 나라에 저작권 수출을 할 때도 어떤 나라에서는 거절당하는 일이 생긴다. 심지어 작가는 아들을 둔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그림책을 주문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아직도 세상의 어른들은 여전히 편견의 벽이 높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럴수록 세상 끝까지 펼쳐지기 위해 이 작품이 사람들에게 더 다가가야 할 이유를 찾는다. 명수정 작가의 그림책은 어떤 슬로건보다 부드럽지만 강하다.



정병규_행복한그림책연구소 소장, 『우리 그림책 작가를 만나다』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0년 5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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