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지 나라의 가나다

글자 세계로 떠나는 기발한 모험

by 행복한독서
가방 가게에 가서 나는 늑대를 샀네.
다리를 건너니 당근 밭.
바람 불고, 번개 치고, 비가 오더니
바다가 되었네.



뭐든지 나라의 가나다

박지윤 글·그림 / 38쪽 / 15,000원 / 보림



우리는 모두 한때 문맹이었던 시간을 겪었습니다. 누가 대신 읽어주지 않으면 저 글자 무더기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던 시절이죠.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어 가장 좋은 일은 책마다 품고 있는 이야기의 세계로 ‘혼자서도’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다는 점이에요. 무수한 책 속에는 무수히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글자는 만능 초대장처럼 책마다 펼쳐지는 다른 세계로 우리를 이끕니다. 문맹을 떨친 우리가 다른 세계로 떠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은 고독과 시간뿐이지요.


『뭐든지 나라의 가나다』는 글자가 이야기가 되는 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가에서 나로, 나에서 다로, 다에서 라로 건너갈 때마다 예상치 않았던 세계를 종횡무진 넘나듭니다. 책 속에서 아이는 부모 없이, 친구 없이 혼자 떠납니다. 모험의 여정에서 늑대와 당근과 말과 용과 비구름과 또 다른 많은 것들과 만나고 헤어짐을 거듭하며 나아가지요. 이 가나다를 엮어 만든 이야기는 재미를 찾는 말놀이이면서 동시에

‘너는 글자를 배워 어떤 세계로든 혼자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는 거야. 책 속으로의 그 여행은 혼자 떠나는 것이겠지만 그 속에서 너는 친구를, 모험을, 사랑을, 다른 많은 것들을 만날 수도 있을 거야’

라는 속삭임 같은 것이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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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다의 첫 기획은 각 자음당 해당 자음으로 이루어진 단어 위주로 짧은 이야기를 짜서 ㄱ부터 ㅎ까지 총 14권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는데 사실 혼자 소화하기에 너무나 장대한 계획이었죠. 그래서 편집자 의견을 참고해 한 권으로 다시 이야기를 짜보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틀을 잡은 후, 글이 설명하지 않는 장면의 디테일을 만들어가는 데 시간을 들였습니다.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는 건 디테일이니까요.


가방 가게의 주인아저씨는 혼자 온 꼬마 손님에게 몹시 정중합니다. 늑대는 빨간 목줄을 스스로 버리고 아이의 옆에서 나란히 걷고, 먹구름 책에서 낱낱이 분해되어 흩어진 글자 비는 본래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의 바다로 쌓여 흐릅니다. 과업을 마친 사발 속의 용은 유유히 물속으로 헤엄쳐 떠나며, 아이스크림 나무에는 피라미드를 지키는 스핑크스처럼 파수꾼이 있습니다. 펭귄 폐하는 손수 무거운 짐을 옮기고, 늑대는 채식을 하며, 당근은 자신을 허락 없이 베어 먹는 자에게 분노를 표출합니다.


‘내가 먹음직스럽게 보인다고 해서 맘대로 나를 와그작 먹다니!’ 당근의 분노는 타당한 것 아닐까, 그리고 채식 늑대는 무리에서 소수자이기 때문에 아마도 당근의 화를 이해하고 사과하고 금세 어울릴 수 있게 된 것일 거야 하고 만들면서 혼자 생각합니다. 전면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내가 만든 이 작고 어처구니없는 세계를 흐르는 정서와 가치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장면을 만들어갑니다.


만들면서 특히 마음이 갔던 장면은 통조림 가게의 가족사진입니다. 투명인간은 쉽게 막살 수 있는 존재잖아요. 그러려고만 하면요. 가게의 음식도 몰래 먹을 수 있고 남의 물건이나 돈도 마음먹으면 가져갈 수 있습니다. 대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관계를 맺기가 어렵겠지요. 그런데 통조림 가게의 투명인간은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클래식한 옷을 단정하게 갖춰 입고 립스틱을 발라 자신의 말하는 입 모양을 드러내어 타인에게 존재를 알립니다. 그리고 성실하게 통조림 가게를 운영해 살아가는 자영업자죠. 가게를 정갈하게 유지하고 통조림들을 정리 정돈하고, 다양한 통조림을 수급하고, 홍보 전단지도 만들고, 타조 아르바이트생도 고용해 전단지도 뿌려야 하고, 재고도 너무 쌓이지 않게 떨이든 세일이든 처리해야 하고,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고단한 삶을 선택한 겁니다. 편하게 살 수 있는데, 고립된 편안함 대신 ‘고단한 존재감’을 선택한 것이죠.

얼굴도 안 보이는 투명인간이 가족사진이 다 무어냐고 놀리는 소리에 답하는 통조림 가게 사장님의 목소리가 저에게는 느껴집니다.

‘뭐 어때. 우린 보이지 않는 것에 기대 함부로 살고 있지 않아. 다른 이를 기만하지 않고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나를 드러내고 가꾸며 제대로 살려고 애쓰고 있어. 이게 나야, 이게 우리 가족이야.’

자신의 한계에, 세상의 비웃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족사진을 매장에 걸어둡니다. 아아, 저는 이런 존재를 정말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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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만들고 그리는 일은 독자에게 보여줄 세계를 먼저 여행하는 것과 같아요. 결말이 불확실한 긴 여행을 떠나서 먼저 길을 잃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중간에 밑천이 다 떨어지는 경험을 하며 끝내 결말을 찾는 일이지요. 이 여행이 어려웠지만 즐거웠습니다.


책을 읽는 여러분에게는 즐거운 경험만 가닿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아마 책을 덮은 후엔 가나다 글자를 연결해 작은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질 거예요. 그럴 때 글자는 도구가 됩니다. 머릿속에만 있는 무언가에 형태를 주고 옷을 입히고 한 세계를 만드는 놀라운 도구가. 아마 여러분은 작은 어려움을 만나게 되겠지요. 하지만 분명 그보다 더 큰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박지윤 작가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러스트레이션학교(Hills)에서 그림책과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습니다. 여러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렸고, 『뭐든지 나라의 가나다』와 『돌부처와 비단장수』를 쓰고 그렸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1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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