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만드는 단단한 연대
높은성 깊이 들어가면 새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요?
높은성 높이 오르면 반짝이는 별들을 볼 수 있을까요?
호랑이 바람
김지연 글·그림 / 42쪽 / 12,500원 / 다림
긴시간 삶이 멈춰졌다. 빛나는 졸업장을 안는 아이들의 졸업식에 갈 수 없었고, 콧물 닦으며 입학하는 초등학교 입학식도 없었으며, 사랑 가득한 출발인 결혼식도, 이승과 마지막 인사를 하는 영혼의 장례식도 갈 수 없었다. 집안에서 외톨이가 되어야 했다. 코로나19를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우린 멈추고, 스스로 돌봐야 했다. 나는 작년 봄의 연장선에 있는 것 같았다.
그날도 나는 의심의 여지없는 평범한 일상을 누리고 있었다. 저녁 7시경 어쩌다 뉴스를 보게 되었는데 고성에서 산불이 났다. 일상은 멈췄고 뉴스에 온통 신경이 곤두섰다. 초속 23미터의 강풍이 불어 사람이 걷기 힘든 상황으로, 불은 산을 뛰어가며 이동했다. 순식간에 고성은 불바다가 되었다. 부디 인명 피해만큼은 없기를 바라며 다음 날 아침까지 밤새 뉴스를 통해 고성을 보았다. 행정안전부 산하로 있던 소방청이 독립하면서 소방청장이 전국에 있는 소방관과 소방차, 진압 인력 및 장비를 총동원할 지휘 체계를 가진 것이 빠른 진화가 가능한 계기가 되었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역시 자정 전에 풀가동되었다.
재난을 대하는 우리의 시스템이 변했다. 몇 해 전 봄 여행길 아이들을 잃을 때처럼 발만 동동 구르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고속도로를 밤새 달려가는 전국 소방차들의 행렬을 보고 울컥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고, 어서 빨리 저 도움의 손길이 화마의 현장에 닿기를 모두 간절히 바랐다. 뿐만 아니었다. 물불 안 가리고 위험에 가장 먼저 달려가는 소방관들, 비정규직 특수진화대, 화약이 있는 창고가 걱정되어 스스로 찾아가 화약을 날랐던 사람, 퇴근길 병원 쪽에서 화재 소식을 접하고 병원으로 되돌아가 환자들을 대피시킨 간호사(나중에 보니 자신의 집은 전소가 되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탄 버스에 불이 옮겨붙자 아이들을 지킨 선생님들, 오토바이로 사람들을 대피시킨 사람들. 누군가가 달려들어 불을 끄고 사람을 살렸다.
질문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재난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타인의 고통을 나와 사회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함께한다는 것, 스스로 돌보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성숙한 시민의식의 고양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우리는 무엇에 연대하고, 나는 어찌 성장해야 하는가?
“우리 집이 다 타버렸어요.” 고성에서 만난 열 살 여자아이가 웃으며 내게 이야기를 했다. 나의 지나친 오버일 수도 있지만 “끄떡없어요. 집도 없고, 책도, 인형도 다 탔지만 나에게 앞으로 펼쳐진 날이 가득한걸요. 이렇게 학교도 다니고, 친구들도 만나고. 어른들이 밤에 모여 새로 짓는 집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나도 가서 창틀 옮기는 것을 도왔고요. 나는 잘 자랄 테니 보아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 아이가 울며 말할까 봐 지레 겁을 먹었던 나에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 아이처럼 다시 웃으며 삶의 터전을 가꾸고 일구는 것, 직면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부터가 답을 찾아가는 시작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을 긁어모아 만든 『호랑이 바람』이 지금의 이야기다. 그새 우리는 또 다른 재난을 마주했고 새로운 시스템 속에서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개인과 사회가 노력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마스크 대란에 폐지를 줍는 할머니가 손수 만든 마스크를 기부하고, 자신은 몸이 불편해 외출을 하지 않는다고 마스크를 기부한다. 기하급수로 환자가 생기는 대구로 달려간 의료진들, 병상이 모자란 대구 환자들을 받아준 광주 시민들, 공포로 모두 꺼리는 우한에서 귀국한 동포들을 받아준 아산 시민들, 증세가 있자 스스로 자가 격리를 하며 계단과 도보 이용을 한 시민들, 질병관리본부의 전문가들, 지자체의 공무원들. 성숙한 시민의식을 지닌 개개인과 연대하는 공동체가 앞으로 우리가 가꾸어 변해갈 세상에 희망의 증거이다.
그림책쟁이가 너무 거창했는가? 작업이 증거로 다 남았는데 부끄럽다. 그림으로 이야기를 해야 하니 실력이 부족한 작가는 고민을 많이 한다. 물과 기름의 원리를 생각하다 마블링 원리와 이야기 의도가 잘 맞는 것 같아 마블링으로 불을 만드는 연습을 했다. 시중에 판매하는 마블링 물감보다 천연 재료로 만들어 색이 더 고운 터키산 마블링 물감을 이용해 생명력을 가진 불을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주로 쓰던 칼로 새긴 그림인 판화로 어려움을 이겨낸 나무들을 만들어 두 이미지를 통해 이야기를 이끌었다. 그렇지만 이야기의 마무리는 희망을 품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나보다 훨씬 멋진 사람(어린이!)들이 만들 세상을 기대한다. 난 굴에서 혼자 이야깃주머니를 뒤지며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며 꿈꾸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가끔 주변 편집자들과 친구들이 정신 차리라고 물도 뿌려주고, 내 굴 앞에서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 나를 자주 밖으로 끌어낸다.
살려고 밖으로 나와 보면 늘 행복하다. 이렇게 신문에 글도 쓰고 여러분을 만난다. 5월은 이미 우리 안에서 푸르다. 내년 봄은 더 푸를 것이다. 희망이 그렇게 만든다. 우리는 서로 보이지 않고 모르지만, 당신이 건강하고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김지연 작가는 첫 그림책 『부적』부터 『호랑이 바람』까지 총 열세 권의 그림책을 만들고 어른을 위한 에세이 두 권을 썼습니다.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지우개’로 불리며 서로 배우고 있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0년 5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