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시간

가만히 바라보며 채우는 휴식의 시간

by 행복한독서
작아지는 기분이 들면 도토리 안으로 여행을 떠나요. 오롯이 혼자서 평온한 쉼을 누리며작지만 아름다운 것들과 눈을 마주합니다.



도토리시간

이진희 글·그림 / 48쪽 / 17,000원 / 글로연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보통의 힘든 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혼자 작업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있음에도 머릿속에는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창문 밖 초록의 풀들을 바라보던 어느 날 『도토리시간』의 원고를 공책에 적었습니다.


도토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언제부터였는지 떠올려봅니다. 다람쥐의 갈색 친구 도토리는 작업실 창가에 늘 놓여 있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저는 늘 제가 자리하는 공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쓰던 작업실 한편에는 저만 쓸 수 있는 작은 방이 있었지만 종종 정말 혼자 있다면 어떨지 생각하며 창가의 도토리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혼자 있는 공간에서 충분히 쉬고 있었음에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홀로 며칠 동안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하는 생각이 자주 스치던 시기였습니다. 어쩌면 불완전한 일상 속에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완전한 휴식을 꿈꾼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도토리시간』의 주인공은 아주 힘든 날 작아진 몸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곳은 집 안 구석에 놓인 그림 속 다람쥐 친구가 있는 도토리 안으로의 여행입니다. ‘도토리시간’은 어쩌면 그토록 소중한 ‘나’의 존재를 잠시 잊는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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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인상 깊은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산양 세 마리가 산의 절벽 한가운데의 작은 틈에 나란히 서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사진 속의 산양들은 한 걸음만 잘못 내디디면 죽음을 맞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았던 산양들의 눈빛은 그저 덤덤했습니다. 동물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마치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들의 불행을 멀리서 바라보듯 평온해보였습니다. 그 사진을 바라보며 평온함과 슬픔이 함께 공존하는 이상한 감정을 경험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때의 마음은 일상 속에서 종종 다시금 기억났습니다. 길을 걷다 작은 동물과 눈이 마주쳤을 때,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볼 때,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 흐르는 물의 냄새를 맡을 때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런 작은 시간들은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아니었고, 흘러가는 무언가를 그저 바라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주 가만히 한곳에 앉아 저 멀리에 있는 슬픔을 지긋이 바라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때로 아주 소중한 것들은 값없이 우리 주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뜻한 해의 빛과 지나가는 서늘한 바람, 아름다운 털을 가진 동물들. 발밑과 머리 위로 보이는 풍경들을 떠올리면 그렇습니다. 불완전한 모습으로 도토리 안으로의 여행을 떠난 주인공은 그렇게 자신의 밖을 바라보며 완전한 휴식을 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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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시간』을 처음 구상한 다음, 그림책으로 만들어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스케치 과정에서도 여러 변화가 있었고 제 생각의 흐름도 조금씩 모양이 달라졌습니다. 그림책을 만드는 일에는 지난한 과정들이 함께합니다. 수없이 색연필을 깎고 흐트러진 자세도 가다듬으며 한 장 한 장 그림을 완성해나갔습니다. 완성될 그림책이 누군가에게는 자연을 바라보는 순간처럼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숲속의 장면들을 그렸습니다. 분주하고 어지러운 삶 속에서 얽힌 마음의 결을 부드럽게 가다듬을 여유를 가져다줄 수 있는 그림책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 책의 그림을 그리며 마음이 답답했던 날, 때로는 가만히 자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예전보다 깊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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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그림책 『어느 날 아침』의 그림을 그리던 시절, 늦은 밤 산책 중 흐르는 물의 냄새를 맡고 마음을 치유받았던 때를 기억합니다. 길을 걷다가 마주치는 동물들의 눈을 보며 시간이 멈추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한곳에 서서 지나가는 노을의 색을 오랫동안 바라봅니다. 이처럼 모두에게 종종 찾아오는 ‘도토리시간’이 삶을 살아내는 동안 작은 선물처럼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진희 작가는 성균관대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제1회 CJ그림책상 일러스트레이터 부문에 선정되었습니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려 합니다. 쓰고 그린 책으로 『어느 날 아침』이 있으며 그림을 그린 책으로 『기다릴게 기다려 줘』 『책 읽어주는 할머니』 등이 있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9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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