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에서 만난 그림책 작가 11 - 노인경
작가의 작업실이 있는 연남동은 말 그대로 젊은이들이 많고 활기 넘치는 거리다. 그는 이곳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19세기의 파리는 하릴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인상파 화가들은 그 순간들을 잡아내 화폭에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21세기 서울 한복판 도심 속 화가의 작업실 주변은 늘 무언가에 쫓기듯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이 화가는 분주한 거리의 한쪽에서 자신의 작업에 몰두한다. 사람들과의 교류보다는 늘 혼자서 뭔가에 집중하는 것이 익숙한 터였다. 특별히 그림책의 주제를 고민하기보다는 아주 사소한 것에 애정을 갖고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스스로 홀로 되는 것에 익숙해 있지만 외롭고 고독한 시간이 길어지면서 문득 두려웠다. 대학 졸업 뒤 취직보다 먼저 쉼을 택한 길이 이탈리아로 가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바대로 그렇게 이끌렸다. 이탈리아에 어울릴 것 같다는 예감, 그러나 사실은 두려움을 털고 낯선 곳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다. 다른 한편으로 항상 낯선 풍경을 좋아한다는 취향이 실제로 그곳을 택하게 했다. 이탈리아에 도착해 예정했던 학교로 찾아갔는데 어이없게도 수강생이 차지 않아 폐강되었다는 얘길 들었다. 덕분에 다른 학교를 추천받아 간 곳이 국립미술원이었다. 강의실 의자에 앉기 전에 반드시 만져보고 확인해야 하는 그런 곳이었다.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놓아둔 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야 하는 곳이 의외로 그와는 잘 맞는 것 같았다. 아주 느슨한 형태의 커리큘럼은 조급하거나 쫓기지 않아도 되었다, 하나의 주제를 통해 판화와 사진 등 다양한 기법으로 작업할 수 있다는 점도 그를 안도하게 했다.
『기차와 물고기』는 그렇게 먼 이국땅에서 구상하고 완성해 한국에서 출간한 책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도, 그럴 수도 없는 기차와 물고기의 만남 그리고 헤어짐은 앞으로 그가 보여주게 될 작품 세계의 첫 출발이면서 예고편에 불과했다.
고교 2학년 무렵 우연히 어머니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게 된 일은 무척 특이하면서도 운명적인 일이었다. 딸의 남다른 취향을 알아챘는지 서슴없이 길을 안내한 어머니의 뜻을 따랐다. 그러나 왜 미술대학을 가야 했는지 뚜렷한 이유도 생각하지 않은 채 택한 길, 그래서 대학 생활 내내 남들이 하지 않은 고민을 했다. 정말 원하는 길이었는지, 나만의 색깔이 뭔지에 대한 갈등이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녔다. 마지막에 졸업 작품이 그림책으로 마감되었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흐트러진 생각을 조각 맞추듯 정리해서 완성해가는 그림책, 학교 졸업 작품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하였다. 『책청소』는 당시 졸업 작품 때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에피소드 중심으로 다시 간추려 나중에 출간되었다.
그가 태어나 줄곧 청소년기를 보낸 서울 신림동 지역은 당시에 한참 뻗어나가는 서울의 역동적인 지역 중 하나였다. 그에게는 어쩌면 생태적으로 적당한 곳이었는지 모른다. 약간은 거친듯한, 그러나 부유한 동네와는 다른 서민층이 많이 살고 친밀감이 있는 동네. 다섯 남매는 회화, 디자인, 패션 등 제각각 하고 싶은 일을 챙겨서 헤쳐나갔다. 아버지의 바람과는 모두 다른 길이었다. 성장한 후에야 그런 아버지와의 화해를 시도한 작가는 『코끼리 아저씨와 100개의 물방울』 작품으로 표현했다. 독자들은 이 작품 속을 거닐며 자신의 기억과 동일시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라는 무게감 때문에 별로 소통 없이 성장해온 사람들은 그때를 회고한다. 이제 자신이 아버지의 나이에 이르러 그때를 생각하게 하는 그림책, 그렇다면 이 책의 독자층은 연령대가 아주 넓다. 아이는 아이대로 코끼리 아저씨의 양동이에 물이 없어지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지켜보고, 무사히 아기 코끼리들에게로 돌아오는 것에 손뼉을 친다. 어른 독자는 힘들어도 말 없고 가끔 겁이 많아 멋지지 않고, 때때로 짜증 나기도 했지만 이제 그 모두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되었다. 여기서도 작가의 다양한 시도를 엿보게 되는 픽셀 아트 방식은 오아시스에 수없이 모여든 코끼리 무리를 보면서 이 기법의 재미난 효과를 맛보게 된다.
다른 작품들 『책청소부 소소』 『너의 날』 『곰씨의 의자』 『고슴도치 엑스』 등에서도 작가의 모습을 본다. 지우고 싶은 글자를 대신 지워주는 요정 같은 ‘소소’도 그렇고 사람들과 깊이 있는 관계를 꺼리며 적절한 거리감을 우선하는 작가에게 ‘곰씨’는 어쩌면 자신의 캐릭터에 더 가까울 것 같다. 하루살이로 하루를 살든 코끼리로 백 년을 살든 똑같이 소중한 생명에 단 하루 생일을 축하하는 『너의 날』은 경이로운 선물이다. 도시의 밤, 외따로이 난간에 앉아있는 고양이는 건너편 건물들을 통째로 케이크 삼아 옥상에 켜진 불빛으로 생일을 맞고, 쓰레기 더미에 타다 멈춘 케이크 촛불 주위로 모여드는 하루살이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이 그림책은 ‘너의 날’이면서 ‘모든 생명의 날’이 되는 작품이다. 특히 작가의 사랑하는 새 생명이 작업이 거의 끝날 무렵 세상에 나와서 더 뜻깊었다.
아이는 거리에서 길을 걸어야 안정을 찾았고 그런 와중에 자주 나선 연남동 공원길 벤치에서 아이가 잠들면 스케치를 한다. 그리고 또 그려서 한없이 그린 스케치 250여 장을 모아 간추려 64점, 여기에 이야기를 더한 것이 『나는 봉지』다. 거리에서 바람에 날려 세상을 배회하는 노란 봉지는 이렇게 거리에서 그려져 태어난 생명력 강한 작품이다. 그의 많은 작품은 마치 작가들이 여럿인 것처럼 모두 다르다. 캐릭터, 작법, 재료, 주제, 늘 새로운 시험이 계속된다. 작고 소박하고 얇은 부피의 그림책을 그는 사랑한다. 그래서 갈증을 느끼듯 더 작업하고 싶어 한다.
힘을 빼고 그리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의 작업에 무거움은 없다. 무게가 없기에 아이부터 어른까지 보고 즐기는 것 아닐까. 힘을 빼고 보면 더 재밌다. 그림책은 책과 그 안의 생각이 모두 가벼워도 뒷맛이 깊게 우러나는 묘미가 있다. 그의 그림과 이야기에서 계속 그 웅숭깊은 맛을 본다.
정병규_행복한그림책연구소 소장, 『우리 그림책 작가를 만나다』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0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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